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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평세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찾은 보수주의 - 시편 90편의 '인간 연한'

Updated: Feb 13, 2020

에이브러햄 링컨의 게티즈버그(Gettysburg) 연설은 미국, 아니 전 영어권을 통틀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불과 10개의 문장으로 이뤄진 그 간결함 덕분에 미국인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외워지고 인용되는 연설이기도 하다. 미국의 교과과정에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이 연설을 쉽게 외울 수 있도록 제작된 노래와 랩(rap)이 여럿 있을 정도다.

“여든하고도 일곱 해 전에” (Fourscore and seven years ago)로 시작해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가 지구상에서 멸망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로 끝나는 이 헌정사는 사실 게티즈버그 국립묘지 봉헌식의 행사측으로부터 링컨이 “적절한 몇 마디 말씀”을 해줄 것을 부탁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링컨은 이 기회를 통해 “자유의 새로운 탄생”(a new birth of freedom)을 선언하며 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 중 하나로 장식했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11월 19일, 그로부터 4개월 전 양측에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남긴 게티즈버그 전투의 숨진 병사들을 봉헌하는 자리에서, 링컨은 이 짧은 2~3분 분량의 연설 속에 희생자들에 대한 가장 완벽한 추모는 물론이고 미국의 건국정신과 당면한 전쟁의 명분, 그리고 미국의 장래에 대한 염원까지도 매우 통렬하고 온전하게 담아냈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1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미국인들에게 큰 울림과 유효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 이유다.

그리고 이 연설은 북한 동포의 ‘노예제’를 두고 남북으로 갈라져 있을 뿐 아니라, 노예해방을 위해 싸워야 할 한쪽에서마저 둘로 쪼개져 자멸 수순을 밟고 있는 현재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Fourscore and seven years ago”

이 게티즈버그 연설의 한 문장 한 문장에 담겨 있는 심오한 뜻과 정신은 이미 수많은 책과 논문에서 다뤄졌다. 그러나 여기서 특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비교적 많이 다뤄지지 않은 “Fourscore and seven years ago” 라고 시작하는 연설 도입부의, 너무도 잘 알려져 있지만, 생소할 수 있는 영어 표현이다. 한 ‘score’는 ‘20’(스물)을 뜻하는 영어의 고어(古語)다. 따라서 ‘Fourscore’는 80, 즉 우리말로 ‘여든’을 의미한다.

링컨은 야외에서의 대중연설인 만큼 직관적인 이해가 쉽도록 “87년 전에” 라고 하지 않고 왜 굳이 여든과 일곱을 나누어 “여든하고도 일곱 해 전에” 라는 표현을 구사했을까? 단순히 운율적 운치를 고려한 수사적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19세기 당시 미국에서는 score로 수를 세는 것이 매우 일상적인 표현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보다 깊은 뜻이 있는 것일까?

사실 킹제임스버전(KJV) 영어성경의 표현에 어느 정도 익숙한 크리스천이라면 이 ‘score 계수법’이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예순’을 뜻하는 threescore와 ‘여든’을 뜻하는 fourscore는 킹제임스 영어성경에 각각 89번과 35번이나 나온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에이브러햄 링컨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을 뿐만 아니라 성경, 특히 당시 미국 사회에 널리 보급되었던 킹제임스 성경을 거의 외울 정도로 완전히 통달하고 그 문맥과 언어를 내면화하고 있었다. 아메리칸 대학의 대니얼 드라이스바흐(Daniel Dreisbach) 교수는 특히 이 게티즈버그 연설에 “킹제임스 성경의 운율(rhythm)과 어법(phrase)과 주제(theme)가 곳곳에 담겨있다”고 관찰한다.

1620년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올 때 품에 지녔던, 최초의 영어 주석성경이자 대중보급 성경인 제네바성경도 ‘score’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영국 식민지 시절과 독립혁명 즈음에 미국인 대부분의 가정에는 제네바성경 혹은 킹제임스성경이 비치되어 있었고 사실 당시 미국인의 국어교육은 성경으로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남북전쟁 당시에도 미국인 3분의 2가 크리스천이었고 대부분 제네바성경이나 킹제임스 성경의 표현에 익숙했다는 사실은 성경의 문체가 미국인들의 국어 구사력의 가장 권위 있는 모범 어법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링컨이 연설에서 청중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성경적 표현’을 차용한 것은 가장 호소력 있고 엄숙하게 대중을 단숨에 사로잡기에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링컨은 이 “여든하고도 일곱 해”라는 표현에 어떤 수사학적 효과 이상의 무게를 담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링컨의 고뇌는 단순히 내전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유족들을 위로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연설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그는 “자유로 잉태되어(conceived in liberty)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명제에 바쳐진(dedicated to the proposition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미국이라는 국가가, 그 명제를 위해 싸우다 둘로 쪼개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음을 처절하게 실감하고 있었다.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 can long endure.)

이는 노예제 폐지에 반발해 미합중국으로부터 분리를 선언한 남부지역뿐만 아니라, 북부에서도 이제 전쟁에 지쳐 남부연합군과 평화협정을 꾀하는 민주당의 반전(反戰) 움직임 때문이기도 했다. 링컨은 아직도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남북전쟁의 가장 참혹했던 전투의 폐허 위에 서서, 주어진 짧은 시간에 국민을 위로할 뿐만 아니라 설득하고 연합시켜야 하는 중차대한 순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자연법이라는 영감과 신앙

1776년 건국의 아버지들이 기독교 전통에서 흘러온 자연법의 영감과 삼권분립 및 연방주의라는 천재적 발상으로 세워낸 자유공화 합중국 미국이지만, 이제 다시 더 이상 인간의 힘만으로는 그 나라를 지켜낼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미국이라는 위대한 정치철학적 실험(American experiment)이 인간의 결정적 한계에 다다른 것을 통감한 것이다.

드라이스바흐 교수는 링컨의 “Fourscore”라는 표현이 시편 90편 10절의 “우리의 연수가 칠십(threescore years and ten)이요 강건하면 팔십(fourscore years) …”이라는 구절에서 차용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링컨이 외우고 이었던 시편 90편의 모세의 기도에는 바로 그 어쩔 수 없는 인간 한계에 대한 뼈저린 통찰,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는 인간조건의 깊은 성찰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평균 일흔 해, 길어야 여든 해인 “인간의 연수”(10절)를 이제 일곱 해나 넘어가는 미국은, “사람의 자랑과 수고”(10절)가 아닌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에 맡겨진 “은혜의 영역”에 놓여 있었다. 링컨과 미국인 모두는 “세대를 넘어 우리의 거처”(1절)가 되신 창조주 앞에 “날아가는 티끌”(3절, 10절)이자 “밤의 한 순간”(4절)임을 깨닫고 “날 계수함”(11절)을 배워 오직 “은총”을 구해야 하는 (17절) 처지였던 것이다.

일흔하고도 한 해를 넘어가는 대한민국

광야의 40년을 마쳤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바로 눈앞에 두고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이 기도의 주인공 모세의 심정도 이와 같았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 노예생활에서 구출해 내고 무려 40년 동안 시내산의 법도를 백성에게 훈련시킨 모세였다. 하지만 그를 포함해 애굽에서 나온 어느 누구도 요단강 건너의 언약의 땅을 밟지 못하게 되었다. 죄로 인한 사람의 한계는 정해진 것이었고 여호와의 섭리는 모세가 죽은 후 완전히 다른 다음 세대 여호수아를 통해 확인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링컨도 남북전쟁이 끝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암살되었다.)

그것은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은 받지 못하는” (히 11:39) 믿음의 영역이었다. 그렇게 모세는 자신은 밟지 못할 그 땅의 후손들을 위해 신명기를 남기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인간 행사를 위탁하며 두 번 간절히 사무치는 기도를 올렸다.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17절)

이제 71살이 되는 대한민국이 놓인 처지도 그렇다. 사람의 연수인 “일흔 해” (threescore years and ten)를 넘어 이제 한 해가 지나고 있다. 100년 전 “자유로 잉태”해 71년 전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는 명제에 바쳐진 이 자유민주공화국은, 비록 한반도의 반쪽으로 시작했지만 놀라운 개인의 자유와 번영을 이뤘다. 이제 과연 그 자유의 나라가 우리 인간의 연한 이상으로 버틸 수 있을지를 시험받는 치열한 내홍을 겪고 있다. 일부는 이미 이 과정에서 생명을 바쳤고 우리는 그 희생 위에 서 있다.

이 시점에 우리에게, 적어도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필요한 것은 모세와 링컨의 기도처럼 “날 계수함”을 깨닫고 인간 연한을 넘어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실 창조주께 엎드리는 것이다. 71년 전 제헌국회 첫 회의에서 이승만 임시의장이 고백했듯이, 자유민주공화국을 이 땅에 세우게 된 것도, 지금까지 공산주의의 엄습에도 버티며 자유를 지켜온 것도,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자랑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즉, 이제 자멸과 자유회복의 기로에서 다시 한번 자유를 선택하기 위해 창조주의 간섭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간됨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보수주의 정신의 가장 핵심이 되는, 인간의 태생적 한계와 인간 상위의 창조질서에 대한 뼈저리는 인정이다. 그렇게 비로소 창조섭리의 안목을 가지고 믿음의 영역에 발을 내디딜 때, 이 땅에 노예 된 자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북한 동포와 마침내 함께 누리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자유의 탄생”(new birth of freedom)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2019년 5월 <미래한국>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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