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교인들이 북한의 포로된 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자유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한민족이라서? 인권이 “인류 보편의 가치”라서? 북한 주민들이 불쌍해서? 이는 물론 틀린 이유들은 아니지만 교회의 이유는 아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부음 받은 성도들이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전파(사61:1, 눅4:18)해야 하는 마땅한 이유는 그것이 곧 복음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한민족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북한의 인권을 부르짖는 것이라면 우리는 북한정권의 “우리민족끼리”라는 함정에 빠질 위험이 크다. 인민이 “자유”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에서 미 제국주의 등의 외세를 먼저 내쫓아야 한다는 북한정권의 논리에 끌려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김일성의 술수에 넘어간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후, 우리의 통일 담론은 줄곧 이 함정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인류 보편의 가치라는 개념도 창조질서와 진리에 뿌리내리지 않는다면 상대주의적 왜곡과 인본주의적 흐름에 휘둘린다. 이미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동성결혼, 낙태, 안락사 등을 “세계 기준”으로 내세우고 있다. 북한주민들을 마냥 가엾은 존재로 여기며 연민의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것도 자칫하면 스스로의 감정소모에 집착하는 자기애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북한자유운동이 곧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살릴 돌파구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의 자유를 외치는 것은 성도 개인의 무뎌진 양심을 깨워 복음으로 활력을 되찾게 한다.
둘째, 북한의 동포들을 구출하는 것은 한국 국민의 근본 목표로서 이를 추구하는 것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맡은 자유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을 회복하게 하고 확고하게 한다.
셋째, 한반도에서 자유의 북진(北進)은 복음의 서진(西進)이라는 인류구원사적 흐름에 돌파구 역할을 한다.
성도의 양심
한국교회에게 북한동포는 사실 어마어마한 양심의 짐이(되어야 한)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세계에서 가장 호화스럽고 풍족한 환경 속에서 종교의 자유와 예배를 누리지만, 동시에 가장 가까이에 우리와 같은 언어를 쓰는 형제자매친척들이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경을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고문과 처형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 참혹한 아이러니에 대해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거나 미미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우리는 양심의 짓눌림을 피하고자 현실을 애써 외면하거나 변명거리를 찾는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북한동포들의 소식을 들어도 “정치적”인 것으로 치환해 긍휼한 마음마저 일어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무뎌진 성도의 양심은 신앙생활을 병들게 하고 교회의 선한 영향력을 쇠퇴시켰다.
북한자유운동은 성도의 어두워진 양심을 깨워 교회의 영향력을 회복시키는 정면 돌파다. 지난 20여 년 동안 우리 사회 주변 곳곳에 들어온 탈북자들은 북한의 상황에 대해 분명하고 정확하게 들려주고 있다. 그들을 통해 그동안 북한동포들을 외면했던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북한주민들을 기억함으로 한국교회는 그동안 풍요롭게 누렸던 자유에 대해 감사하고 억눌린 자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공포하는 교회 본연의 역할을 회복할 수 있다.
단기선교를 다녀온 사람들은 한 가지 공통된 간증을 한다. 선교여행을 출발하기 전에는 온갖 선물과 부채춤 등의 다양한 활동을 준비하며 현지인들과 선교사들을 위해 큰 헌신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일정이 끝날 즈음에는 대부분 선교여행의 가장 큰 수혜자가 자기 자신이었음을 겸허히 깨닫는 것이다. 참가자들은 선교현장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함을 통해 그 복음의 비밀스런 운동력을 체험할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역할이 얼마나 작았는지를 알아차림과 동시에 그 아무것도 아닌 작은 헌신을 얼마나 놀랍게 쓰시는지를 목격한다. 북한선교와 북한자유운동도 마찬가지다. 북한자유운동은 한국교회 회복의 돌파구다.
국가의 양심
둘째로 북한자유운동은 대한민국의 정체성 회복을 위해 필수적이다. 1953년 북한을 해방하지 못한 채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8월 10일 대국민 성명을 통해 이렇게 선포했다.
“공산 학정 속에 당분간 그대로 남아있게 되는 우리의 불쌍한 동포들에게 나는 이렇게 외치는 바입니다. 절망하지 마시오. 우리는 결코 당신들을 잊지 않을 것이며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잃어버린 이북 5도와 북한의 우리 동포들을 다시 찾고 구출하려는 한국 국민의 근본 목표는 과거와 같이 장차에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국부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민의 근본 목표를 북한의 동포 구출에 두었다. 이것은 자유민주적 토양이 탄탄하지 않은 한국인들에게 북한동포 구출, 즉 북진(北進)이라는 분명한 목표의 설정을 통해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을 유지시키려는 이승만 대통령의 묘수였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그 근본 목표를 상실했다. “선경제, 후통일”이라며 북진을 미뤘지만, 감당하지 못하는 경제성장과 풍요로움을 누리게 되면서 북녘의 동포구출과 북한해방통일이라는 국가정체성은 잃어버렸다. 국가의 양심을 잃은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위기와 국론 분열은 바로 북한동포를 구출해야 하는 국가 양심을 잃어버린 원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공산전체주의 세력에게 빼앗긴 북한과 우리 동포들을 되찾지 않은 대한민국은 사실상, 헌법상 미완(未完)이다. 북한동포들을 해방시키는 자유통일을 이룰 때 비로소 대한민국의 1948년 건국은 완성되는 것이다.
19세기 중반 미국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1776년 미국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자명한 진리” 위에 세워졌고 미국의 국부들은 분명히 남부의 모든 노예들을 해방시킬 것을 약속했지만,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약속의 이행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남부의 노예인구는 더욱 늘어났고 남부농업경제는 더욱 노예제와 결속되어 갔으며 오히려 ‘캔자스-네브래스카 법(1854)’을 통해 북부지역에도 노예제가 확산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때 미국의 교회는 1776년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선언문 발표 당시 울려 퍼졌던 ‘리버티벨’에 세겨진 “이 땅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레25:10)”는 문구를 기억해냈다. 그리고 일리노이 주의 링컨 변호사는 미국의 건국정신에 충실한 공화당을 창립하고 대통령이 되어 남북전쟁이라는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결국 모든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그렇게 미국은 공화국을 지켜냈을 뿐 아니라 건국을 완성한 것이다. 링컨이 16대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국부”라고 불리는 이유다. 대한민국은 북한노예해방을 외치며 국가 양심의 회복을 주도할 교회를 통해 결국 회복되고 더 나아가 자유통일을 이룰 것이다.
자유의 서진(西進)
마지막으로, 한반도에서 자유의 북진(北進)은 복음의 서진의 돌파구다. 세계지도를 꺼내보자.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완성된 이후, 이 복음은 조금씩 서쪽으로 전진해왔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자유롭게 믿도록 보장하는 ‘자유문명’은 그 복음을 좇아왔던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 아테네(그리스)와 로마로, 그리고 서유럽의 종교개혁을 거쳐 영국으로, 또 미국으로. 이후 이 복음은 19세기 말 미국의 선교사들을 통해 조선으로 와서 자유문명의 씨앗이 되었고, 그 씨앗은 한국교회와 이승만의 대한민국으로 성장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 이 복음이 결국 중국 공산권과 이슬람권을 지나 예루살렘으로 흘러갈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현재 지도를 보면 이 복음의 서진이 한반도의 휴전선에서 멈춰있다. 자유문명 또한 마찬가지다. 한반도에서의 자유통일 북진이 복음의 서진의 돌파구가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어진 소명이 이토록 중차대하다. 한국교회의 북한자유운동이 하나님의 인류구원사적 복음화 역사의 매우 결정적인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부산생명수교회 2021년호 <북한을 위한 행진> 매거진에 실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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