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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평세

1620년에 태동한 1776년의 자유

혼돈과 탄식의 2020년이 지나갔다. 특히 미국의 2020년은 코로나로 인한 보건위기 및 경기침체에 더해, 1월 트럼프 대통령 탄핵안 의회상정과 5월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으로 재점화된 ‘Black Lives Matter(BLM) 폭동시위, 그리고 11월 대선과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그 후폭풍 때문에 하루도 혼란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21년에도 2020년의 여파는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지난 2020년은 메이플라워호가 대서양을 항해한 지 400주년으로, 미국에게 있어 매우 뜻깊은 한 해로 기념되어야 마땅했던 시간이었다. 사실 400년 전 메이플라워호를 탔던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 올해 초부터 영국과 네덜란드 라이덴(Leiden), 그리고 미국 플리머스 등에서 3개국이 막대한 예산을 들인 기념행사들이 기획되기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대부분 취소되거나 대폭 축소되었다.

메이플라워 400주년 기념우표 (USPS)

그러나 메이플라워 400주년이 퇴색된 것은 팬데믹 때문만은 아니었다. 1620년의 그 위대한 항해와 깊은 의미를 지우고 미국의 근본정신을 지우려는 ‘1619프로젝트’가 미국의 사회문화 저변을 지배하고 있었다. 또한 “조직적 차별에 대한 흑인들의 저항”이라고 포장된 BLM운동은, 사실 미국의 전통과 근간을 부정하고 훼손하는 네오막시즘적 문화전쟁의 일환이었다.


1619프로젝트를 시작한 뉴욕타임스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주류언론과 ‘빅텍’(Big Tech, SNS와 검색엔진을 통해 여론을 조성하고 주도하는 구글, 페이스북 등 IT 대기업)이 미국을 지워보려는 이 자해소동에 동참했다. 심지어 유튜브의 트위터 공식계정은 작년 추수감사절에 “Thanksgiving” 대신 “Unthanksgiving Day”를 기념하기도 했다. 결국 이러한 폭력적 ‘취소문화(cancel culture)’와 수정주의적 역사왜곡을 등에 업은 바이든-해리스 행정부가 차기정권으로 선출되었다.

미국의 뿌리를 지우는 ‘1619프로젝트’


1619프로젝트란, 2019년 8월 20일 뉴욕타임스의 니콜 해나-존스(Nikole Hannah-Jones) 기자가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처음 미국 땅을 밟았다고 주장하는 1619년의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쓴 비평논설이 뉴욕타임스의 거대한 연속 논평시리즈물로 확대된 것이다. 1619프로젝트의 핵심 골자는 이렇다. 미국의 “진정한 건국”은 1776년 독립선언이나 1789년 헌법의 비준, 혹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의 플리머스 선착이 아니라, 1619년 흑인 노예들의 첫 아메리카 도착으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하나-존스 기자는 그래서 “미국의 DNA에 흑인 인종차별이 흐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미국은 “노예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영국으로부터 독립했고 건국되었다고 단언한다. 미국이 자유공화정이 아닌 “노예정(slavocracy)”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미국은 애초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는 인식을 조장한다.


1619프로젝트를 시작한 뉴욕타임스의 니콜 해나-존스

물론 미국의 독립과 건국 당시 대부분의 국부들이 노예제에 찬성하고 있었다는 그들의 주장은 거짓말이다. 당시 북부주 대표들은 물론이고 남부주 대표들도 노예제를 언젠가는 철폐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노예문제에 대한 그들의 논쟁은 대부분 노예제 폐지의 시기와 방법에 있었지 그 당위성에 있지 않았다. 링컨이 노예해방을 이루어 냈을 때도 그는 미국의 독립과 건국정신에서 그 명분을 찾았다. 당시 링컨과 함께 노예제폐지를 외쳤던 대표적인 탈출노예 프레드릭 더글라스(Frederick Douglass)도 미국의 헌법을 “영광스러운 자유의 문헌”이라고 칭송했다. 또 ‘지하철도’(당시 미국의 교회들이 구축한 흑인노예들의 탈출루트 네트워크)를 이용해 70여명의 노예들을 구출하고 ‘모세’라는 별명을 얻었던 탈출노예 해리엇 툽먼(Harriet Tubman)도 제퍼슨의 독립선언서를 종종 인용했다.


흥미로운 것은 1619프로젝트에 이런 위대한 흑인들과 그들의 업적들은 거의 생략되거나 아주 짧게 다룰 뿐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흑인들을 무기력한 피지배적 희생양으로만 묘사해 피해의식(victim mentality)에 사로잡히게 하며 감정적 분노만 자극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구호는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것 같지만 그들의 논거는 오히려 뿌리 깊게 인종차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19프로젝트의 칼럼들은, 현재 최소 3,500개 학교 교실의 커리큘럼에서 채택되고 주류사회와 의식에 확산되면서 그 왜곡된 역사관이 거의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급기야 1619프로젝트는 작년 5월 퓰리처상(논평부문)을 거머쥐기도 했다.


쓰러진 제퍼슨 동상에 적힌 1619

1619프로젝트의 파괴적인 영향력은 그 직후 폭발한 Black Lives Matter (BLM) 폭동시위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시위참여자들은 실제로 모든 국부들이 인종차별주의자들이라고 굳게 인식하고 있었고, 심지어 노예해방을 이루어 낸 링컨을 포함한 미국 전역에 있는 미국 국부들의 동상들과 기념물을 파손하기도 했다. 그들은 도심 주요건물과 조형물에 페인트 스프레이로 “1619”를 칠했다. 클레어몬트 맥케나 대학의 찰스 케슬러(Charles Kessler) 교수는 한 논평에서 BLM 폭동이 사실상 “1619 폭동”이라고 말한다. 워싱턴포스트의 사라 엘리슨(Sarah Ellison) 기자도 “2020년을 집어 삼킨 건” 코로나가 아니라 “1619프로젝트”라고 썼다.


1619프로젝트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처음 미국에 도착한 것이 1619년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도 따지고 보면 사실이 아니다. 아프리카 노예들은 그보다 최소 수 십년 전부터 스페인과 포르투갈 탐험가들에 의해 지금의 플로리다 지역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래 미국 땅에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도 있었기 때문에 “흑인들의 도착”을 “미국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다분히 인종차별적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1619년을 콕 집어서 “미국의 시작”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다음해인 1620년의 메이플라워호 도착, 즉 필그림들의 미국 정착이 미국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청교도 정신, 즉 기독교 개혁주의 사상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의 뿌리를 지우려는 시도다.

1620년 신앙의 자유 추구로 시작한 미국


1820년 메이플라워의 아메리카 도착 2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다니엘 웹스터(Daniel Webster)는 두 시간에 달하는 열정적인 연설을 통해 필그림들을 “미국 시민자유와 종교 자유의 창시자들”이라고 칭송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국의 뿌리가 1607년 버지니아 제임스타운 정착촌(1619년에 흑인노예들이 도착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1620년 플리머스에 있음을 설파했다. 이후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미국의 민주주의를 연구한 알렉시스 디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도 청교도정신이 “미국 민주공화 정치철학의 근간”이 되었으며 바로 그 출발점을 이해하는 것이 자신의 책 <미국의 민주주의>를 여는 열쇠라고 쓰기도 했다.


메이플라워 서약

1620년 11월 플리머스에 도착한 필그림들과 이후 수십 년 동안 이 지역에 쏟아져 들어온 청교도들은, 비록 21세기 현대 기준의 ‘자유민주주의자’들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삶의 양식과 태도를 통해 ‘왕이 아닌 법 아래 자유’를 실험했다. 이들은 메이플라워에서 내리기 전 서로 언약을 맺는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기독교 신앙의 부흥, 그리고 왕과 나라의 명예를 위하여”라는 명분으로 시작되는 ‘메이플라워 서약’이다. 헤리티지 재단의 케이 제임스(Kay James) 회장은 200단어 미만의 이 짧은 문헌에 “종교의 자유와 법치, 그리고 사유권을 확립한 미국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메이플라워 서약은 미국 헌법의 원형으로 여겨질 만큼 그로부터 150년 후 세워질 미국의 자유민주공화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청교도 정신은 다름 아닌 마틴 루터와 존 칼뱅의 개혁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그들은 가톨릭교회와 성직자들이 하나님과 일반인들 사이의 중재자라는 교리를 거부하며, 각 개인이 성경을 읽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스스로 설 수 있다”는 만인제사장적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기주의’와 혼동되기도 하는 미국인들의 ‘개인주의’는 다름 아닌 이러한 독립(獨立)정신에 근거하고 있다.


이 독립정신은 자연히 모든 사람이 성경을 직접 읽어야 한다는 필연적 의무감을 고취시켜 문맹률 감소에도 놀라운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당시 아이들이 문자를 배우는 이유는 성경을 읽기 위함이었고, 각 가정에서 오직 성경만을 가지고 국어(영어)를 익혔다. 때문에 17세기 중반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문해율은 각각 23%와 29%였던데 비해 당시 미국(뉴잉글랜드)인들의 문해율은 95%에 육박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창조주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부여한 자연권을 믿었고, 국민의 동의를 바탕으로 한 공화정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왕정이나 입헌군주제를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보았던 기존 기독교 사상가들은 종교개혁 이후 17세기에 들어서서야 공화정이야 말로 성경에 입각한 정치체제라는 주장을 내놓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다름 아닌 유대 랍비들의 구약 주석에서 얻어낸 것이었다. 특히 사무엘상 8장에서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엄히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유대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라,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공화정을 갈망했다. 그리고 국교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신대륙의 공동체는 이 열망을 실험할 최적의 토대가 되었다.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건국을 준비하게 된 사상적 근거가 바로 이 청교도들의 영성과 신앙에서 비롯되었다. 청교도들은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폭정에 대해 저항하는 것을 단순히 권리라고 여기는데 머무르지 않았다. 그들은 폭정에 대한 강한 저항을 기독교적 숭고한 의무로 여겼다. 특히 당시 로마서 13장을 둘러싼 개혁주의 사상가들의 해석에서 이러한 입장을 엿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는 “위에 있는 권세”가 폭정이라 할지라도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과거 기독교인들의 이해였다. 칼뱅은 하급 과료가 위에 있는 권세에 저항할 수 있는 경우도 있음을 인정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이후 칼뱅주의자들인 존 녹스(Knox), 조지 뷰캐넌(Buchanan), 테오도르 베자(Beza), 존 포넷(Ponet), 사무엘 러더포드(Rutherford), 그리고 프랑스의 위그노 사상가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협하는 공의롭지 못한 폭정에 대해 저항하는 것을 단순한 권리 이상의 의무로 여겼다.

새로 복구되어 건조된 메이플라워호

훗날 2대 대통령을 역임한 존 아담스는 “청교도들의 고된 노력과 고통이 없었다면 미국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존 포넷의 <정치권력론(A Shorte Treatise on Politike Power)>(1556)에 “훗날 알제넌 시드니(Algernon Sydney) 와 존 로크(John Locke)에 의해 부연설명 될 모든 핵심적 자유의 원칙들이 이미 다 담겨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프랑스 위그노 개혁사상가가 쓴 <폭정에 대한 저항(Vindiciae contra Tyrannos)>도 18세기 미국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에드먼드 버크(Burke)는 미국의 독립혁명이 “프로테스탄트교(개신교)의 프로테스탄트주의(반대주의)”가 결국 열매를 맺은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버크는 1775년 영국 의회에서 “미국인들은 생각과 의견의 모든 맹목적 복종을 본능적으로 거스르는 프로테스탄트들(개신교도들/반대주의자들)”이라고 경고했다. 당시 영국 왕 조지 3세는 미국인들의 독립전쟁 포고를 “장로교의 반란”이라고도 부르기도 했다.

메사추세츠 거주민들의 일반법과 자유 (1648)

결국 미국인들은 영국의 존 로크가 <통치론>(1689)을 쓰기 수십 년 전부터 청교도적 독립정신과 개혁주의 신앙을 통해, 하나님에 반하는 불의한 세상 지도자들에 대해 저항하는 것을 당연하고 마땅한 것으로 체화해왔던 것이다. 그들은 정착 이후 150년 동안 영국 지배자로부터 대서양 건너 멀리 떨어져 있는 최적의 조건과 비교적 높은 지적 바탕을 통해, 당대 가장 공화적인 정치제도와 법치주의를 연습할 수 있었다.


또한 동시에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전적타락론을 바탕으로 정착 초창기부터 모든 권력 잡은 자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을 의식했다. 청교도 목사였던 나다니엘 워드(Nathaniel Ward)가 모세의 법령과 유대 랍비들의 주석을 참조해 1641년 뉴잉글랜드 정착촌의 법률로 설정한 <매사추세츠 자유법령(Body of Liberties)>도, 시민들이 지켜야 할 규칙들보다 시민들에 대한 관료들의 권력을 제한하는 규칙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매사추세츠 거주민들의 일반법과 자유>(1647)는 훗날 미국 권리장전(수정헌법 1조부터 10조)의 시초가 된다. 수정헌법 1조에 첫 번째 명시된 시민 자유는 다름 아닌 신앙의 자유였다.


이 근본정신에 입각해 지난 11월 미국 대법원은 코로나 방역을 이유로 종교 활동을 필요 이상 제한한 뉴욕 주의 조치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사실 이것도 5대 4로 간신히 이루어진 위헌판결로서 불과 그로부터 한 달 전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에이미 코니 배럿(Amy Coney Barrett) 대법관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종교의 자유 수호를 최우선순위 중 하나로 여겼던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년 동안 미국의 건국정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헌법 원문주의자(originalist/textualist) 대법관 3명과 수백 명의 연방판사를 임명한바 있다. 미국인들에게 있어 신앙의 자유가 방역보다도 소중하다는 위대한 판결은, 1620년 메이플라워 필그림에서 1776년 독립정신으로 이어지는 미국 정신의 근원을 제대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619의 정신을 배후에 둔 바이든-해리스 행정부가 향후 최소 4년 동안 어떻게 미국의 뿌리를 다시 훼손할지 우려되는 이유다.


(이 글은 기독교 세계관 월간지 <월드뷰> 2021년 1월호 게재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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