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평세

구텐베르크 혁명과 종교개혁이 일깨운 ‘독립정신’

근대사의 가장 큰 전환점을 선정하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열 손가락 안에 종교개혁을 꼽을 것이다. 근대 지성사의 세계적 권위자인 켄틴 스키너(Quentin Skinner) 교수는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 I, II』라는 두 권의 명저에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각 권의 부제로 달았다. 자유, 평등, 권리와 같은 근대 사상 – 자유주의 정치사상 – 의 기초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뿐만 아니라 절반은 종교개혁에 있다고 본 것이다.

서구 정치사상에 대한 통념은 그 초기 시작과 발전과정이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계몽주의에 기반한 지극히 세속적 질서의 맥락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신화에 가깝다. 하버드 대학교 역사학자 에릭 넬슨(Eric Nelson)은, 근대 초기 종교개혁으로 인한 개신교의 신학적 법철학과 가톨릭의 정치론 및 교회법, 그리고 유대교의 사상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세속 이론만큼이나 서구 정치사상과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를 통해 촉발된 종교개혁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붙인 그의 대자보가 전 유럽을 휩쓴 종교개혁의 신호탄으로 작용하게 한 매우 실질적이고 중대한 일전의 한 사건을 먼저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로부터 약 70년 전 점화된 구텐베르크 인쇄혁명이다.


‘구텐베르크 인간’

신성 로마 제국 마인츠 출신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00? ~ 1468)는, 1440년 경 자신의 야금기술과 주조기법에 와인프레스 등을 응용·접목해 새로운 ‘가동형 금속활자(movable metal type)’ 인쇄술을 창안한다. 기존의 필사 방식이나 목판 인쇄술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높은 생산력과 양질의 인쇄물을 훨씬 더 싸게 제공하는 획기적인 출판기법이었다. 구텐베르크는 라틴어 문법책, 가톨릭교회의 미사 전서 및 면죄부 등을 인쇄하면서 이 금속활자 인쇄술을 마스터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1450년대 초부터 거금의 투자를 받아 라틴어 성경 대량 인쇄에 착수한다.

결과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일일이 베껴 쓰는 기존 필사 방식으로는 3년에 겨우 한권 정도 복제·생산되었던 성경이 같은 기간에 무려 180권이나 ‘찍혀’ 나왔다. 필사본에서 종종 발생된 오·탈자나 왜곡도 물론 없었다. 무엇보다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이 ‘신기술’은 이전의 인류가 알지 못했던 ‘책의 시대’를 열었다. 과거 책 한권을 출간하는 데 평균 2, 3개월이 걸렸었다면, 이제는 한 주에 500권의 책이 생산 가능해졌다.


또한 구텐베르크 인쇄기법은 그 원리만 알면 금방 모방·응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유럽 전역에 기하급수적으로 퍼져나갔다. 1462년 마인츠에서 일어난 전쟁은 구텐베르크 인쇄소에서 일했던 많은 장인들을 본격적으로 유럽 곳곳으로 흩어지게 했다. 1500년에 이르러선 유럽 236개 도시에 약 1,000곳의 인쇄소가 생겨났고, 이곳에서 일하는 인쇄공들은 약 1만에서 2만 명에 이르렀다. 구텐베르크 이전 1천여 년의 중세시대를 통틀어 유럽에서 약 10만여 권의 책이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구텐베르크 이후 불과 50년 만에 최소 3만 종의 책이 대략 1,500만 부에서 2,000만 부가 생산되었다고 하니, 이 ‘문자의 폭발’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문명적 기여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대하다.


1999년 타임지, 그리고 2000년 대영박물관은 ‘지난 1천년의 인물(Person of the Millenium)’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를 선정했다. 저명한 미디어이론가이자, ‘지구촌(global village)’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한 문명비평가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은 근대의 인간을 아예 ‘구텐베르크 인간’이라고 불렀다. 청각-촉각 등을 포함한 오감을 통해 정보를 수용했던 과거와 달리, 이 시각적 문자홍수 속의 ‘활자인간’은 그 선형적(linear)이고 정형화된 질서에 의해 보다 내성적이고 이성적이며 개인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맥루한은 그런 인간을 ‘조각난’ 인간이라며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결과적으로 이 문자문화는 유럽인들로 하여금 부족주의 및 집단적 세계관을 벗어나 표준화된 객관성과 합리성 및 자율성을 추구하는 독립된 개인들로 재탄생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이처럼 ‘개혁을 위해 준비된’ 바탕에서 1517년 10월 31일, 33세의 마르틴 루터는 마침내 비텐베르크 성(Castle)교회 정문에 95개조 논제를 써 붙였다.

종교개혁과 자유주의

95개조 논제의 요지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모두가 그 존엄성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모든 사람이 각자 ‘하나님 앞에 홀로 선,’ 즉 ‘독립(獨立)’된 개인으로서의 주권과 자율과 양심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직을 사고팔거나, 교회의 권위를 이용해 개인의 구원을 거래하는 면죄부를 팔아 이익을 꾀하는 것은 기독교의 본래 정신에 전면 위배되었다. 구원은 오직 회심을 통한 개인의 믿음으로(sola fide) 주어지는 것이었다.

미 의회도서관에 전시된 구텐베르크 성경

이내 루터는 일반인들이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 성경을 직접 접할 수 있도록 독일 언문(vernacular language)으로 성경을 번역했다. 그의 대자보가 그랬듯이, 루터의 독일어 성경을 비롯한 그의 설교문 및 논증들은 물론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통해 빠른 속도로 보급되었다. 그의 설교문 중 최소 2건은 2, 3년 만에 20쇄를 찍기도 했다. 한 추정에 따르면 1518년부터 1525년까지 독일에서 출판된 모든 책의 무려 3분의 1이 루터의 저작이었다고 한다.


이후 루터의 개혁은 스위스의 츠빙글리(Zwingli), 프랑스의 칼뱅(Calvin), 스코틀랜드의 녹스(Knox), 그리고 영국의 틴데일(Tyndale) 등에 의해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국가체제의 압제와 집단의 불합리에 ‘저항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s, 개신교)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들은 그 어떤 왕이나 교황보다 더 높은 권위인 헌법이 있다고 설파하며, 더 나아가 개인의 자유에 의거한 공화정을 주장했다. 이들의 저항 정신은 오늘날 서구문명이 누리고 있는 근대 자유주의의 뿌리가 된 것이다.



영국의 교회사학자 알렉 라이리(Alec Ryrie) 교수는 『Protestants(프로테스탄트)』라는 저작에서 개신교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관찰하며 종교개혁의 정신이 어떻게 근대 서구문명을 이루어냈는지 잘 보여준다. 그는 특히 ‘사상의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비정치성(apoliticism)’이 근대 사회에 기여한 개신교의 정신이라고 설명한다. 개인이 자유로이 의문을 품는 것을 장려하는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민주주의에 힘을 실어주었고 시민들로 하여금 부당한 권위에 민감하게 대처하게 했다.


또한 끊임없는 혁신과 개혁을 가능하게 하여 인류에 공헌했다. 그러면서도 이생의 유토피아가 아닌 천국을 바라는 개신교의 신념은 그들의 혁명적 열기를 식히고 신정(theocracy)의 기대를 잠재워 비정치성을 유지하게 했다. 물론 때로는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는 통치세력에 대해서는 담대히 맞서거나 뒤집어엎기도 했지만 말이다.

한국의 구텐베르크와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마지막으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무려 80여년이나 앞섰던 ‘한국의 자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1377년 고려 청주에서 찍어낸 ‘직지심체요절’이다. 심지어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에 ‘직지’가 영향을 미쳤다는 식의 억지스런 다큐영화(‘직지코드’)도 있었고 유명작가의 소설도 있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직지’는 자랑이라기보다 한국인에게 반성해야 할 주제다. 기술이 그렇게 빨랐음에도 인류는커녕 한반도에서조차 아무런 공헌이나 정보혁명을 일으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개발과 거의 동시에 있었던 조선왕 세종의 한글 창제(1446)도 마찬가지다. 한글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아무런 문화나 문학도 만들지 못했다. 물론 한글은 자모의 결합을 통해 각 글자가 표현되기 때문에 금속활자 인쇄술을 활용하기 위해선 한자보다도 더 많은 활자를 주조해야 하는 기술적 문제도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인쇄술 개발의 주체와 동기에 있었다.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는 민간 개인이 상업적 목적으로 제작한 것이었지만, 직지와 한글은 국가의 필요에 의한 정책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왕조시대 책의 출간은 모두 왕의 결정이었고, 책값은 터무니없이 비쌌으며, 인쇄기술과 정보는 국가가 독점했다. 심지어 민간의 책 생산이나 배포를 처벌하기까지 했다. 근대로의 발전은커녕 오히려 중세 질서를 고착화한 것이다.


결국 한국인은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근대에 들어선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결정적인 매개역할을 종교개혁의 열매인 개신교가 감당했다. 심지어 한글에 띄어쓰기를 더해 실제 활용 가능한 ‘언문’으로 만들어준 인물은 만주에서 활동하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였다. 물론 한글로 된 최초의 단행본도 성경이었다. 한글로 된 최초의 신문 「독립신문」 또한 그 창간과 발행에는 선교사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최근 한국 사람의 근원을 추적하는 방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함재봉 교수는, 한글이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재발견되고 재창제”되었다고 말한다.


한국인이 최초로 선거와 자치를 경험한 것도, 1948년 건국 당시 5.10선거보다 훨씬 전인 1887년 한국 최초의 조직 장로교회 새문안교회를 공식 창립하면서 투표로 두 명의 장로를 선출하면서였다. 이후 1894년에 세워진 곤당골교회(서울 승동교회 전신)에서는 백정이 양반 후보들을 누르고 장로로 선출되기도 했다. 바로 훗날 인권운동가가 된 박성춘이다. 또 1905년에 시작된 전북 금산교회에서는 한 집에서 자기 주인을 제치고 먼저 장로로 선출된 머슴도 있었다. 바로 이자익 목사다. 그가 섬겼던 주인 조덕삼 장로는 자신의 머슴인 이자익 장로를 아예 평양신학교에 보내 목사로 키운 것이다. 이렇게 한국인은 종교개혁의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통해 아래로부터 ‘탈조선’하며, 개인 자유와 권리를 서서히 확장하고 다가오는 민주주의를 준비했다. 이러한 정신적 토양이 있었기 때문에 훗날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자유민주공화국을 건국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의 건국은 미완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북한을 해방시키지 못한 반쪽 건국이었기 때문이다. 그 과업의 완수를 위해서라도, 한국의 구텐베르크 인간은 끊임없이 프로테스탄트 정신으로 재무장하여 자유의 적으로부터 미래를 탈환해야만 할 것이다.


(이 글은 자유기업원 25주년 기념으로 출간된 <자유의 순간들(지식발전소, 2022)>에 수록된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