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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평세

출애굽기를 통해 보는 '국민됨'의 조건

국민(nation/people)이란 무엇인가. 국민은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는가. 그리고 국민은 어떻게 스스로 통치하며 바람직한 국가를 이룰 수 있는가. 이는 정치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이다.

한국어로는 종종 ‘민족’으로 번역되어 종족주의적인 혈통중심의 결사체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영어의 ‘nationhood’는, 사실 같은 인종이나 혈족에게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개념이 아니다. ‘국민’은 단순히 인종이 아닌, 특정 사람들의 공유된 역사와 기록(기억), 언어문화와 종교적 동질성, 그리고 보다 높은 가치관과 전통으로 합의된 정체(polity)이기 때문이다.


한편 ‘국민’이라는 번역도,국가가 민의보다 우선한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자면 온전한 의미전달이 되지 못한다. 영어의 ‘nationhood’은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뿐만 아니라 국가주의(statism)와도 상이한 것으로, 국가결사체(statehood)의 전제조건이 되는 개념이다. 언어적 한계로 인해 굳이 수식어를 붙여야 한다면 정치학계에서 규정된 ‘시민 민족주의(civic nationalism)’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 최초의 ‘국민국가’ 이스라엘

요람 하조니(Yoram Hazony)는 그의 저작 <The Virtue of Nationalism(민족주의의 미덕)>(2018)에서 이 '민족주의(nationalism)’가 본래 프로테스탄트 정신의 요체인 성경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스라엘이라는 국민국가가 사실 유대인이라는 혈통중심의 민족주의가 아니라 공유된 신앙과 십계명이라는 도덕법 질서를 통해 이루어진, 다양한 이민족들의 합의와 포용을 수반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조니는 고대 이스라엘이 당시 ‘부족’이나, 이집트, 바벨론, 앗수르, 페르시아, 그리고 로마에 이르는 ‘제국’에 맞서 ‘국민국가’라는 대안개념을 제시한 인류 최초의 정치공동체였다고 지적한다.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 광야에서 형성된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선대를 조상으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 혈족에 갇힌 배타적인 부족주의 공동체가 아니었으며, 무력이나 기술을 통해 주변 부족들을 철권으로 흡수하고 통치하는 제국주의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이나 스페인 제국에 맞서 시민자유를 명목으로 근대 국민국가 개념을 부활시킨 유럽의 종교개혁 정신(혹은 프로테스탄티즘)도, 다름 아닌 고대 이스라엘을 모델로 삼았다. 진정한 의미의 온전한 국민국가이자 자유민주공화제의 종주국인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 현대 보수주의를 철학적으로 정립하고 미국 정치질서의 근원을 추적한 러셀 커크(Russell Kirk)는 그의 역작 <The Roots of American Order (미국 질서의 뿌리)>(1974)에서, 미국인들이 필라델피아에서 구현한 정치형태가 그 이전 대략 네 개의 도시문명을 통해 발전된 전통유산이라고 밝혀냈다. 바로 영국 ‘런던’의 자연권 및 보통법 개념, ‘로마’의 공화제와 법치전통,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사상,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문명의 도덕법(율법) 전통이다.



또 다른 미국의 저명한 인문학자 레온 카스(Leon Kass)도 올해 1월 출간된 <Founding God’s Nation: Reading Exodus (하나님의 건국: 출애굽기 읽기)>(2021)에서 비슷한 맥락의 주장을 하고 있다.

카스는 더 나아가 국민국가의 원형(prototype)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국가형성 과정의 탐구를 통해, 현대 국민국가가 잊어버린, 그래서 결과적으로 진정한 국가관과 인간관마저 잃어버리고 있는, ‘국민됨’의 세 가지 조건(혹은 기둥, pillars)을 도출하여 제시하고 있다. 첫째, 공동체가 공유하는 전래와 노래(애굽으로부터의 해방); 둘째, 서로 간의 계약을 뛰어넘는 인간 상위의 천부적 도덕법(언약과 율법); 그리고 셋째, 지속되는 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임재 향유(인간 한계의 자각과 성막 건축)이다.

바벨탑과 애굽, 그리고 ‘탈’애굽

창세기를 통해 우리는,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창6:5)”인 인간의 전적 타락과 그로 인한 “땅의 패괴함(11,12),” 그리고 홍수 이후에도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문화명령을 거역하여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창11:4)”려고 하는 인간의 죄된 본성을 볼 수 있다. 1세기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창세기 10장의 “세상의 처음 영걸” 니므롯이 이 바벨탑을 건설하였으며 이것이 정부조직 체계를 가진 인류 최초의 국가였다고 기록한다. 인간 정부는 결국 창조주를 대적하고 대체하고자 하는 죄의 경향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인간의 “경영하는 일(11:6)”을 불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각기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10:20)” 흩어지게 하셨다.


이후 하나님은 인간 구원을 위해 아브람이라는 인물을 선택하시고 그 가족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개념의 ‘민족’을 시작하신다. 바로 생물학적 혈통이나 언어가 아닌, ‘언약을 통해 구분된 민족'을 시작하신 것이다. 창세기 17장 14절을 보면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라고 말씀하시며 ‘민족됨’의 새로운 기준을 정하고 있다. 출애굽기 12장 48절에서도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 ...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며 “본토인에게나 ... 이방인에게나 이 법이 동일”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유대 교리, 그리고 히브리민족의 역사관을 받아들임으로써 이스라엘에 편입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전례로 이어지던 히브리 민족은, 애굽에서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먼저 “요셉을 알지 못하는(출1:8)” 새 왕의 출현이다. 이 짧은 한마디는 애굽이란 체제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요셉은 애굽을 당대 최강대국으로 만든 장본인이나 다름없었다. 애굽 전역의 총리로서 모든 애굽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지역 모든 나라들을 기근에서 살려내 애굽왕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준 인물이다. 그런 위대한 인물을 불과 400년 만에(출12:40) 후대의 바로가 알지 못했다는 것은, 애굽이 당대 최고의 건축기술은 자랑했을지 모르지만 얼마나 역사의식이 전무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과학기술 발전으로 교만하여져서 역사와 전통을 지우려고 하는 현대의 많은 국가들을 닮아있기도 하다.

또한 애굽은 자연을 숭배하는 신정일치 전제군주 체제였다. 즉 바로왕은 태양과 가축 등의 자연신을 대언하는 제사장이었다. 이러한 체제 하에서 모세와 히브리민족은, 열 가지 재앙을 통해 그 자연신들을 완전히 능가하는 창조주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다. 애초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히브리민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명분부터 그들이 여호와를 섬기고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출5:1-3).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재앙 중에는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그들만의 첫 종교적 의식도 행하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갈라진 홍해를 건너며 기존 문명과 문화로부터 철저히 구별되어 문명의 백지상태로 돌아가 완전히 새로운 문명코드와 법도를 부여받을 준비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출14:31)”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은 홍해 건너편에서 한 목소리로 노래와 찬송을 부르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인정한다(출15).


카스가 말하는 ‘국민됨’의 첫 번째 조건이 이것이다. 바로 민족 단위의 트라우마와 극적인 체험을 통해 모두가 공유할 수밖에 없는 공통된 전래와 노래다. 400여년의 고된 노역으로 희미해졌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당대 인류 최고의 문명을 압도하는 기적과 드라마로 히브리 공동체에 강력히 각인되게 된 것이다.

율례와 법도

그러나 노역으로부터 해방된 히브리민족은 그 자유를 알지도, 누리지도 못했다. 해방의 노래가 그침과 동시에 그들은 일제히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출15:24), ... 우리가 애굽 땅에서 ... 배불리 먹던 때에 ...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16:3)”라고 부르짖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심지어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14:12)”고 불평하며,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보다 그들이 신음했던 고역을 차라리 그리워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자유보다 편의를 추구하는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정치철학에서 말하는 “외적 자유(external freedom)”와 “내적 자유(internal freedom)” 혹은 “수동적 자유(negative liberty)”과 “능동적 자유(positive liberty)”로 구분하는 분석틀로 이해될 수 있다. 전자의 자유(external/negative)는 속박이나 구속 등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 )를 의미하고, 후자(internal/positive)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유(freedom to ~ )를 뜻한다. 히브리인들은 애굽의 노예제로부터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들이 섬기고 따랐던 애굽 왕국(국가 혹은 인간문명)이라는 생활양식의 기준이 갑자기 부재하자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때 모세에게 장인 이드로가 나타난다. 이드로의 등장과 그의 제언은 국민국가의 기초 원리 중에 하나인 대의민주제의 시초가 되는 사건이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출18:14)” 백성이 줄지어 모세의 판단을 기다리는 백성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선하지 못하(17)”다고 말하며 새로운 “방침(19)”을 제안한다. 백성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 ... 재덕이 겸전한 자 ... 를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로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고 한 것이다(20-22). 모세는 장인의 “모든 말대로(24)” 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백성에게 가르쳐 세울 “율례와 법도”였다. 이드로의 방문 바로 다음 장부터 기록된 시내산(19장)의 십계명(20장)과 “백성 앞에 세울 율례(21-23장)”이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인류 보편적인 도덕윤리체계다. 그 필요성을 절감하고 모세에게 여호와로부터 율례와 법도를 부여받아야 함을 조언했던 이드로가 이방 제사장이었다는 사실도 그 보편성을 증거한다. 한편 레온 카스는 십계명에서 네 번째 계명에 특별히 주목하며 인간 ‘자유’의 원천과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십계명의 첫 네 계명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것이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인간 간의 원칙에 대한 것인데, 네 번째 계명과 다섯 번째 계명만 ‘무엇을 하라’는 능동형 명령이다. 나머지는 모두 ‘하지 말라’는 명령이다. 이는 타락한 인간 본래의 경향이 악함을 나타낸다. 그런데 특히 네 번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20:8)”는 명령은 다른 명령과 달리, 추가적으로 3개 절에 걸쳐 비교적 구체적인 설명이 곁들여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9-11)

엿새 동안 일하되 제 칠일은 반드시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다름 아닌 하나님 스스로가 제 칠일에 쉬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기억하라는 명령이었던 것이다. 해당 창세기 구절,“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라는 말씀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각자 고유하며 존엄한 존재라는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의 근거와 기준이 되는 개념이다. 미국의 저명한 보수주의 평론가인 벤 샤피로(Ben Shapiro)는 국내에도 번역출간된 그의 역작 <역사의 오른편 옳은편>(기파랑, 2020)에서, ‘자유’와 ‘개인’이라는 근대문명의 기원이 사실상 이 창세기 구절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십계명은 또 다른 왕에 의한 속박이 아니었다. 십계명은 창조주의 성품을 피조물에게 드러냄과 동시에 창조주를 닮은 인간됨의 본질, 즉 ‘자유’의 원천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었다.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창조질서에 따른 인간 본연의 자유를 온전히 향유하는 것이다.


인간 서로 간의 계약을 통해 이루어진 규칙이 아닌, 창조주가 창조원리에 따라 피조물 인간에게 부여한 율례와 법도, 즉 도덕법을 알고 세우는 것이 바로 카스가 말하는 ‘국민됨’의 두 번째 조건이다.

금송아지와 성막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치고 세우는 것만으론 불충분했다. 백성은 지도자의 공백이 드러난 즉시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출32:1)”고 요구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금고리를 모아 녹여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을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말하며 숭배했다.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 형상의 구멍이 있다”고 증언한 솔제니친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마땅히 따라야 할 율법을 가지고 있어도 지속적인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하심을 누리지 못할 때 인간은 곧바로 다른 경배의 대상을 갈구하는 것이다.


사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탈출시킨 목적이 그들 중에 거하기 위함이었다. 중요한 건 백성들 스스로 이 목적을 온전히 깨닫고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출29:46).”

결국 금송아지로 인한 여호와 하나님의 분노와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증거판의 깨어짐, 그리고 금송아지를 부셔 만든 가루를 마시고 삼천 명의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도륙함을 통해 이스라엘은 비로소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다(출32:29)”고 기록되어 있다. 더 나아가 모세는 자신의 이름을 주의 책에서 지워달라는 ‘동일시 회개(identificational repentance)’를 올려드렸고(32), 백성은 “슬퍼하여 [그 이후로]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33:4-6)”하여 다시 여호와께 은총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진정한 회개를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자각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를 전심으로 사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모세는 처음 증거판과 같은 돌판을 직접 깎아 만들어 다시 십계를 받았고(34:4), 백성은 스스로 자원하여 성막에 필요한 모든 물품들을 가져다 바쳤다(35:21). 이후 성막의 건축 과정에서도 백성들은 “마음이 감동되고” “마음에 원하여”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 계속되었음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나중에는 성막건축에 필요한 모든 물품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 너무 많이 가져 오므로 ... 모세가 명을 내리매 ... 백성이 가져오기를 정지하니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36:3-7)


이것이 바로 ‘국민됨’의 세 번째 조건이다. 즉, 인간 스스로 는 결코 마땅한 법도를 지키기에 완전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지하고, 끊임없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간섭하심을 사모하는 것이다.


물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예견하였듯이,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이후 가나안 땅에서 결국 예배에 실패한다. 그리고 사사시대 끝에 이르러서는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삿21:25)” 행하며 다시 왕을 구하게 된다. 하지만 “왕의 제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광야에서 친히 보여주신 '국가원형'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왕을 구하는 것은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삼상8:7)” 하려는, 하나님을 대체하려는 또 다른 바벨탑의 건설임을 분명히 경고하셨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자유를 다시 잃어버렸다.

출애굽기를 통해 배우는 ‘자유’란, 각 개인이 외부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초월적 질서를 추구할 수 있는 상태(혹은 그런 상태를 보장하는 정치체제)이며, 개인이 창조주가 정한 법과 질서를 받아들이고 자원하여 따르는 상태이고, 개인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끊임없는 예배를 통해 창조주의 임재와 도우심을 누리는 상태이다. 그리고 그런 개인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국민’이다.

많은 나라들이 개인의 자유를 망각하여 ‘국민국가’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다시 그들을 구원할 “금송아지 왕”을 요구하는 이때에, 한국 국민은 과연 국민됨의 조건을 충족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우리는 인간정부의 노예제로부터 해방된 공통된 노래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인간 간 계약을 넘어 천부로부터 부여받은 자연권과 법도를 존중하고 있는가. 우리의 한계를 절감하며 하나님의 끊임없는 임재와 도우심을 갈구하고 있는가.

(이 글은 기독교 세계관 월간지 <월드뷰> 2021년 5월호에 실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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