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8일 워싱턴 백악관 뜰에서 문재인정부의 대북특사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직접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대변했다. 그때부터 지난 2월 28일 하노이 미북협상 결렬까지 약 1년 동안, 북한은 실로 ‘역사적인’ 외교행적을 남겼다. 김정은은 집권이후 2017년 11월까지 할아버지와 아버지보다 무려 3배 이상의 미사일 도발과 4차례의 핵실험을 감행했다. 하지만 지난 한 해 동안은 도발을 멈추고 무려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유례가 없던 미북정상회담까지 두 번이나 치른 것이다. 이는 ‘비핵화’를 넘어 ‘종전선언’과 ‘한반도평화’에 대한 환상까지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조금 긴 호흡으로 북한의 역사와 그 체제를 차분하게 들여다보면 이러한 설렘이 얼마나 설익은 호들갑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실제로 하노이 협상결렬 이후 점차 드러나는 북한 '비핵화'의 내막은 지난 1년의 ‘평화무드’를 무색하게 하고 있다. 김정은이 하노이를 떠난 지 불과 1주일이 안되어 이미 북한의 미사일 기지에서는 시험발사 재개 움직임이 꾸준히 관측되고 있고 15일 최선희 외무부장은 북한이 ‘미국의 요구에 굴복할 의사가 없고 모라토리엄(핵미사일 실험 중단)을 계속 준수해야 할지도 미지수’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또 그간의 대북 제재를 여전히 지능적으로 회피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핵미사일 개발도 비밀리에 지속하고 있었던 것이 유엔조사를 통해 드러났다. 남북관계도 북측의 일방적인 개성연락사무소 철수 통보로 거품이 되었다.
사실상 북한이 언제든 다시 도발할 수 있는 2018년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간 것이다. 북한정권이 최대명절로 여기는 4월 15일 ‘태양절’ (김일성 107회 생일)이나 항일유격대 창설일인 25일을 전후로 어떤 도발을 또다시 감행한다 해도 전혀 놀랍지 않은 상황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오는 11일 하루일정으로 서둘러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는 것도 지난 1년의 오두방정을 초래한 중매쟁이로서 이런 당혹스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애처로운 임시변통이다.
북핵의 본질
비로소 ‘비핵화’ 환상이 벗겨지고 북한이 그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 지금, 다시한번 북한 핵의 본질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출구가 없다: 북한과 핵무기, 국제안보>(아산정책연구원, 2012)를 쓴 브루킹스 연구소의 조나단 폴락 선임연구원은 “북한의 핵개발은 … 그 국가의 역사와 분리할 수 없다”고 했다. 북핵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문제가 가시화된 1990년대 초나 영변 핵시설이 본격 가동된 1980년대부터가 아니라, 북한의 체제가 형성된 동기와 과정까지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정권의 핵개발 의도는 그 체제의 존재이유(raison d’être)와 목적만큼 뿌리가 깊다.
북한은 1948년 정부수립 이전부터 그 존재이유, 즉 체제의 정체성과 목표가 조선반도 북반부에 강력한 민주기지를 건설하여 남반부에 대한 혁명적 통일을 완수하는 것이었다. 일명, ‘혁명적 민주기지론’이다. 국제정치학적으로 볼 때 북한은 애초부터, 적어도 한반도에 한해서는, ‘현상유지국’(status quo state)이 아닌 ‘현상타파국’(revisionist state) 이었던 것이다.
[신고전현실주의 (neoclassical realism) 국제정치이론에 따르면 대부분의 국가는 무엇보다 안보를 최우선적으로 추구하는 (security-maximizing) 현상유지국이지만 일부 국가는 영토확장이나 팽창 같은 안보 이상의 세력이익을 추구하는 (power-maximizing) 현상타파국으로 본다.]
북한의 대남 ‘현상타파적’ 국가정체성과 목적은 헌법과 노동당 규약 등 국가 기초문서(founding documents)에 명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정부수립 2년만에 무력으로 ‘혁명통일’을 시도했다. 그런데 낙동강전선에서 통일을 코앞에 두고 순전히 미국의 개입으로 전세가 완전 반전되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북반부 민주기지’마저 잃어버리는 상황을 겨우 모면한 김일성은, 이 ‘조국해방전쟁’의 처절한 실패를 통해 매우 결정적인 교훈을 얻었다. 바로 체제의 존재이유이자 목적인 대남혁명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미국의 개입을 억제(deter)해야 하며 세계 최강국의 개입을 억제하는 유일한 방법은 핵무장(nuclear deterrence)이라는 교훈이다. 북한정권에게 있어 미국은 단순히 생존을 위협하는 적대국이 아니라 국가의 존재목적을 가로막는 훼방꾼인 것이다.
그렇게 북한은 6.25전쟁 직후부터 핵무기 자체개발의 초석을 다지기 시작했다. 전쟁 중 이미 북한은 교토 제국대학에서 아시아 최초의 합성섬유인 비날론을 개발하고 서울대 공대학장으로 있던 화학공학자 이승기 박사를 포섭해 납북했다. 북한 원자력공업부 공무원 출신 탈북자 김대호씨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이승기 박사와 또다른 월북 과학자인 도상록 양자물리학 박사에게 “조국통일을 위해 필수적인 핵개발”에 착수하도록 설득했다. 공산권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레닌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승기 박사는 북한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핵개발의 기초를 닦았으며 1967년 설립된 영변 원자력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부임했다.
“주체-수령-핵무기 체제”
60년대 체제 공식이념으로 개발된 주체사상과 70년대 체제공고화를 위해 수립된 ‘수령주의’도 북한의 핵개발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주체사상은 북한의 현상타파적 국가정체성이 극단적 민족사회주의 이념으로 체계화된 것이다. 당시 흐루시초프의 대미 ‘평화공존’ 노선과 소련의 대북지원 중단 및 핵무기 기술전수 거절 등을 계기로 소련과 거리가 멀어졌다. 게다가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을 계기로 중국과도 사이가 나빠진 북한은, 더 이상 강대국의 후견에 체제의 안보와 목적을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독자적 민족사회주의 이념인 주체사상을 개발하여 제도화한 것이다. 이후 1974년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화되면서 권력세습의 정당성을 구축하기 위해 그 주체사상을 김일성의 혈통으로 ‘성육신’(incarnate)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북한체제 형성과 발전과정을 볼 때 북한의 핵개발은, 그 체제의 ‘민주기지’로서의 정체성과 대남혁명통일이라는 존재목적, 그리고 이를 관철하기 위한 주체사상 및 그 화신(化身)으로 우상화 된 ‘백두혈통’과 깊이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2017년 신년사에서 김정은이 핵탄두 운반수단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의 전략무기를 “주체무기”라고 부르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많은 북한학자들은 북한체제를 그 지도자(Leader)와 국가(State)가 동일시된 “Leader-State” 라고 여긴다. 국가 공식 달력인 주체연도가 김일성의 생년과 같다는 것이 그 특성을 잘 보여준다. 이제 북한에게는 핵무기도 그 체제와 동급이 되었다. 퓰리처 상을 수상한 저명한 정치평론가 찰스 크라우트해머는 이미 1990년에 북한과 같은 국가를 “Weapon-State”라고 불렀다.
북한 핵무장 의도의 뿌리가 이처럼 그 체제의 존재목적만큼 깊은데도 불구하고, 북한이 말하는 ‘비핵화’가 미국과 국제사회가 말하는 비핵화와 같은 것이라고 변호하는 문재인정부는, 미국과 전 세계를 상대로 엄청난 기만극을 펼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정의용 특사가 전한대로 김정은이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라고 이야기했다면 더더욱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김일성은 이미 70년대부터 ‘한반도 비핵지대’라는 개념을 설파했고, 영변 핵시설 건설에 착수한 1980년에는 그해 6차 당대회에서 “비핵평화지대”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심지어 영변 핵시설이 본격 가동을 시작한 1986년 9월에는 전세계 80개국에서 대표들을 초청해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를 위한 평양국제회의’(Pyongyang International Conference for Peace and Denuclearization on the Korean Peninsula)까지 열었다.
이때 북한이 스스로 행사에서 사용한 영어단어는 다소 애매모호할 수 있는 “nuclear-free zone”이 아닌 “denuclearization”이다. 문재인정부가 북한이 말하는 ‘비핵화’에 속을 여지는 결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재인정부는 북한정권과 함께 미국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김정은과 문재인의 ‘비핵화’는 CVID나 FFVD(Final, Fully Verified Denuclearization)은 물론 아닐 뿐 아니라, 다름아닌 북한체제의 목적인 주체혁명통일을 완수하기 위한 한미동맹 파기 및 미군철수와 핵우산 철거를 의미한다.
김정은의 정치심리
북한의 현상타파적 국가정체성은 그 역사적 형성과정에서만 노출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심리학에서 사용하는 국가지도자의 언어 컨텐츠 분석 기법을 사용해 북한지도자의 현상타파적 국가정체성과 핵개발 의지의 경향정도를 도출해 낼 수 있다.
먼저 볼셰비키 혁명가들의 세계관과 정치 술수를 이해하기 위해 네이선 레이츠가 1951년 랜드연구소에서 이론화 한 운영코드(Operational Code)라는 분석 틀이 있다. 정치심리학자들은 정치지도자들의 ‘운영코드’를 파악하기 위해 그들의 연설이나 저작 등의 ‘언어행위’에서 정치철학과 대외정책경향을 도출해내는 VICS(Verbs-in-Context System) 프로파일링 기법을 개발했다.
이 VICS기법으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대표저작과 연설들을 분석해보면 세 지도자 모두 세계리더 평균값(35명의 255개 연설 Norming Group, NG)보다 상당히 높은 현상타파적 성향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도표1) 더 흥미로운 것은 김일성(KIS)과 김정일(KJI)이 ‘방어적’ 현상타파주의자(defensive revisionist)로 분류되는 반면 김정은(KJU)의 경우 더 ‘공격적인’ 현상타파적 경향(offensive revisionist)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지도자의 성향을 분석할 수 있는 또다른 유용한 언어 컨텐츠 분석기법은 쟈크 하이만스가 개발한 ‘국가정체성인식’(National Identity Conception, NIC) 도출 방법론이다. 하이만스는 지도자들이 사용하는 언어에서 ‘외부행위자’(external actor)의 계수(count)와 문맥상의 위치(contextual positioning) 분석을 통해 그들의 ‘국가정체성인식’을 네 개의 범주로 분류했다. 그리고 이중 ‘적대적 민족주의’(oppositional nationalist) 성향으로 분류되는 국가지도자들이 핵무장 경향을 나타낸다는 것을 증명했다. 1980년부터 2018년까지의 북한의 신년사를 하이만스의 방법으로 분석해보면, 세 지도자 모두 ‘적대적 민족주의자’로 분류될 뿐 아니라 그 정도가 세습을 거치며 더 강해지고 있는 것이 드러난다. (도표2)
“북핵 = 체제보존” 공식의 함정
지금까지 대부분의 국제정치 학자들과 정책입안자들은 북한의 핵문제를 체제보존의 문제로 봐왔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체제가 우선 보존되야 그 체제의 목적을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이 핵을 개발하는 이유를 체제 자체의 존재이유와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체제생존의 문제로만 보면 심각한 함정에 빠진다. 왜냐하면 이 공식은 북한체제의 보존을 위한 경제적 인센티브나 안보적 보장을 제공하면 북한의 핵포기를 유도할 수 있다는 잘못된 논리를 낳기 때문이다.
이 잘못된 논리구조에 빠져서 미국은 지난 25년 이상의 기간동안 북한의 핵포기를 위해 대북 경제보상과 안보보장 카드를 쓰는 협상을 해왔고 처절하게 실패했다. 헨리 키신저나 그래함 앨리슨 같은 저명한 국제정치학자들도 이 함정을 탈피하지 못하고 북한 비핵화를 위해 결국 북한에게 있어 가장 강력한 '안보보장'인 주한미군 철수를 고려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에게 있어 핵포기는 체제 존재이유의 포기와 같다. 핵포기를 안 할 경우 자멸이나 다름없는 미국과의 전쟁을 걱정하는 김일성에게 “조선이 없는 지구는 폭파해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한 김정일의 허세에는, 사실 그 체제의 매우 중요한 인지적(cognitive) 진실이 담겨있는 것이다. 국제정치이론에서는 체제보존과 같은 지도자의 ‘합리적’(이성적) 행위를 가정하지만, 역사는 수많은 국가가 명예, 자존심, 이념 등의 ‘비합리적’인 이유로 ‘자살’을 선택하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북한은 그 어떤 인센티브에도 불구하고 결코 핵을 버릴 수 없다.
작년 2월 당시 미국 인도태평양 사령관이었던 해리해리스 제독은 미 하원 군사위원 청문회에서 다음과 같은 정확한 문제의식을 보여준 바 있다. “나는 김정은이 단순히 체제를 보존하기 위해 [핵무장을] 한다는 일반적인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의 [핵 야망이], 그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실패했던, 하나의 공산주의 하의 통일을 완수하려는 북한의 태생적 목적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각을 가진 해리스 제독을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국 대사로 발탁해 임명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1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북한이 핵을 결코 포기할 의지가 없다는 의견에 이제 초당적 합의를 이루었다. 지난 주 3월 26일과 27일 미 상하원 외교, 군사, 세출위원회 청문회에서는 각 분야 증인들과 여야 의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북한의 비핵화 가능성에 심각한 의구심을 표현하며 강력한 대북압박의 지속을 주문했다. 주목할 것은 민주당이 장악한 하원에서도 전례와 달리 대북제재에 대해 매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하는 것이라면 무조건 일단 경악하고 혹평하는 ‘트럼프 때리기’(Trump-bashing)에 집착한 민주당에게, 몇일 전 ‘추가 대북제재 철회’를 암시하는 트럼프의 트윗에 대한 관성적 반응이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불과 2년 전 북한정권에 대해 “지금까지 세계가 본 적이 없는 화염과 분노”로 위협하며 핵 추진 항공모함 3척을 한반도주변에 동원해 대북 ‘최대압박’을 전개하고, 이제는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고 표현하며 “환상적 궁합”을 자랑하는 트럼프의 이단아적 성질이, 결과적으론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두 차례 거치며 강경한 대북제재와 압박에 대한 초당적 여론을 낳게 된 것이다. 이제 더 나아가 미국은 북핵문제를 그 체제 자체의 문제로 보고 북한의 체제 변혁(regime change)을 본격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물론 당장 미국 앞에 놓여있는 가장 당혹스러운 문제는 문재인정부다.
[본 기고는 지난 3월 14일부터 16일까지 미국 켄터키 루이빌에서 열린 공공선택학회 (Public Choice Society) 컨퍼런스 발표 내용을 요약,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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