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평세

평화파괴자 편에 선 평화주의자들

푸틴에게 참 ‘쓸모 있는 바보들’

냉전 시기 소련은 자유세계와 국제사회 내에서 의도적으로 다양한 평화 및 군축 시민운동을 일으키고 지원했다. ‘세계 평화’를 구호로 삼은 많은 국제 및 시민사회 단체들이 소련 공산당에 의해 기획되어 운영되었고, 이들은 소련의 프로파간다를 자유진영에 전파하는 유용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들 평화운동은 주로 사회주의 이상과 반미주의 감성을 무기로 삼았는데, 종종 이상주의적인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이 쉬운 타깃이 되었다.

현재 우크라이나 침공을 이끌고 있는 푸틴의 러시아는 더 이상 사회주의 이념에 취해있지 않다. 구 소련과 달리 현재 러시아는 노동자의 해방이나 자본의 착취 등의 선전선동 구호로 세계를 미혹하려 하지도 않는다. 다만, 공산주의 시절 구축된 국가 권위주의를 유지하고자 하려는 관성과 과거 러시아 제국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민족주의적인 환상이 푸틴을 비롯한 일부 엘리트들의 폭력적이고 수정주의적이며 영토회복주의적인 야망을 부추기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세계 곳곳 사회전반에 널리, 그리고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는 좌익 ‘평화주의’ 운동은 여전히 현재 러시아의 호전적이고 평화파괴적인 외교안보정책과 기조를 옹호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그들 입장의 자기모순과 인지부조화가 너무도 명백하고 심각하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푸틴에게 ‘쓸모 있는 바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계기로 영국에서 시작된 ‘전쟁저지연합(Stop the War Coalition)’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러시아가 아닌 미국과 영국 등 서구 자유진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며 전쟁의 주범인 푸틴을 옹호하고 있다.

전쟁의 참혹함을 우려하고 안타까워하며 평화를 사모하는 것은 ‘평화주의자’들의 독점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인 모두의 이상이자 바람이다. 문제는 이들 평화주의 운동이 상당 경우 매우 일관되게 전쟁의 피해자가 아닌 ‘평화파괴자’의 입장을 두둔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과 리비아, 이라크 전쟁에서도 그들은 알카에다나 IS 등의 극단주의 이슬람 세력이 아닌 미국과 자유진영을 비판 대상으로 삼았다. 이번에도 그들은 평화파괴의 주범인 푸틴의 입장을 그대로 반복하며 옹호하고 있다. 그들은 푸틴의 계획적이고 주도적인 우크라이나 침공과 불법적 영토합병 및 전복, 그리고 전쟁수행 중 계속되는 러시아군의 심각한 인권유린과 침해 상황은 철저히 외면한 체, 오로지 미국과 서방의 책임을 탓하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사실상 정당화시킨다.


지난 2월 10일 전쟁저지연합의 온라인 컨퍼런스에서도 그들은 미국과 영국이 러시아의 도발을 ‘유도’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조종’하여 유럽에서의 ‘헤게모니를 확장’하려했기 때문에 푸틴이 어쩔 수 없이 우크라이나를 공격했다는 식이다. 컨퍼런스에 참여한 어느 교수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러시아와 중국의 공동성명을 언급하며 이 두 나라의 입장이 “지속가능한 국제개발을 위한 긍정적인 신호”라고 칭송했다. 또 다른 발언자는 영국과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이 푸틴을 악마화하여 전쟁을 키우고 무기산업의 배만 부르게 하려는 의도라고 비판했다. 영국 노동당 당수를 지낸 자타공인 사회주의 정치인 제레미 코빈(Jeremy Corbyn)도 이 컨퍼런스에 참여해 서방 자유국가들의 ‘전쟁 동원’을 비판했다. 컨퍼런스 불과 이틀 전에 푸틴은 우크라이나와 자유세계에 ‘핵전쟁’을 위협한 참이었지만 여기서는 어느 누구도 푸틴과 러시아를 비판하지 않았다.

김정은을 미소 짓게 하는 ‘평화주의자들’

한국인들이 특별히 평화주의 운동을 경계하고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많은 소위 평화주의 운동가들이 ‘평화’를 앞세워 한국의 안보를 해치고 있을 뿐 아니라 한반도 평화 파괴의 주범인 북한 정권을 노골적으로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제주해군기지 건립 반대부터 시작해 사드(THAAD) 배치 반대 등 대부분의 ‘반전평화’ 운동에 동참하며 ‘국제 평화운동가’라고 언론에 소개되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 노골적으로 북한을 변호하거나 옹호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미국을 기반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크리스틴 안(Christine Ahn)이다. 안 씨는 2015년 5월 세계 저명한 여성운동가 30여명을 모아 비무장지대(DMZ)를 도보로 건너는 ‘위민크로스DMZ’ 행사를 기획해 한국에도 널리 알려졌다. 미국의 극단적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Gloria Steinum)과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메어리드 매과이어(Mairead Maguire)와 리마 보위(Leymah Gbowee) 등이 이 행사에 참여했다.


이들은 당시에도 평양에서 만경대를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의 혁명적 생애에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는 둥, 북한정권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발언들을 일삼아 구설수에 올랐다. 미국에 돌아가서는 트위터를 통해 아예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 동지의 뜻에 충실하자”는 문구가 담긴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세계적인’ ‘평화운동가’들이며 더구나 ‘여성’ 운동가들이라는 그럴듯한 포장 때문에 수많은 국내 여성 단체들과 시민사회가 이들의 움직임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동참했다.


이후 크리스틴 안은 이 행사를 통해 구축한 네트워크와 이력을 배경으로 미국에서 탄탄한 기반을 쌓고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한 다양한 운동을 일으키고 있다. ‘코리아피스나우(Korea Peace Now)’라는 단체가 대표적이다. 이 단체는 정기적인 문화행사와 학술모임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정치로비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해 미 의회에 ‘한반도 종전선언’안이 수차례 상정되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다. 올해에도 크리스틴 안은 한국의 보수 대통령 당선이 한반도 평화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취지의 기고를 주류 매체에 기고했다. 지난 6월에도 Korea Peace Advocacy Week(한반도 평화 옹호 주간)을 개최해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고 정치인들을 로비하는 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미국 내 종북·친북 성향 단체를 오랫동안 추적하고 고발해 온 로렌스 펙(Lawrence Peck)은 구체적인 사진자료와 기록을 통해 크리스틴 안의 위민크로스DMZ 행사기획이 북한정권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을 폭로했다. 이 행사를 기획한 안 씨는 실제로 행사 일 년 전인 2014년에 북한을 방문했고 이후 뉴욕 주재 유엔대표부에 파견된 통일전선부 소속 박철 요원을 수시로 만나며 행사를 준비했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통일전선부는 북한의 대남공작부서다. 크리스틴 안은 미국 내 대표적인 종북 인사 신은미와 노길남 등과도 친밀한 유대관계를 갖고 있다.


이들 평화주의자들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한반도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 촉구나 북한인권법 및 대북제재 반대, 한미 군사훈련 비판, 탈북자 비난, 천안함 등 북한도발 부정 등은 모두 하나같이 북한정권의 입장과 정확히 일치한다. ‘김정은에 충성하는 미국 내 로비스트’와 다를 바가 전혀 없다. 단지 ‘평화’라는 깃발을 들고 있다는 이유로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프리패스’를 얻는 것이다. 당연히 이들은 북한의 핵문제나 인권문제에는 철저히 침묵한다. 오히려 북한의 핵개발을 변호하거나 북한인권 문제가 과장되었다고 일축한다.


과거 노길남의 ‘민족통신’이나 ‘6·15공동선언실천 미국위원회’ 또는 뉴욕 소재 청년교육단체 ‘노둣돌’과 같은 한인사회 시민단체들도 모두 ‘한반도 평화’나 ‘평화통일’를 주제로 삼고 미국 내 분별력이 부족한 한인 2,3세를 끌어들인다. 지금까지는 한인사회 일부의 일탈적인 움직임이었던 재미 종북세력이 이제는 젠더정치 등의 좌익의 제도권 침투 흐름을 타고 미국 주류사회에 진입해 효과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다.

극단적 평화주의자는 간첩이나 마찬가지

평화를 파괴하는 적에 맞서고 있는 전장에서, 적군이 아니라 아군을 향해 ‘평화’를 윽박질러 방어태세를 약화시키는 행위는 사실상 간첩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이 논지는 사실 대한민국의 국부 이승만 박사가 1941년 출간한 책의 내용이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망과 ‘전쟁심리’를 폭로하고 미국 내 ‘평화주의자’들과 ‘제5열(간첩)’에 대해 경고했던 <Japan Inside Out>는, 그해 11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예언이 적중하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에서 이승만은, 평화를 파괴하는 적을 상대로 싸우지 않는 것은 오히려 반(反)평화주의라는 진리를 설파했다.


결론을 대신하여, 책의 관련 부분(14장)을 아래 발췌하여 옮긴다.

나는 종교적 신념에 입각해서 사람에게 향하여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고 말하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존중한다. 그러나 전쟁이 국방과 국가의 명예, 그리고 국가의 독립을 위한 것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전쟁이라면 무조건 반대하여 싸우는 그런 투쟁적인 평화주의자들은 간첩들과 마찬가지로 위험하고 파괴적인 존재들이다.


그들의 동기는 다를 수 있지만 그 결과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호전적 국가의 침략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침략성이 전혀 없는 자신들의 조국이 국토방위를 위하여 대비하는 것을 방해한다. 평화를 신봉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나라를 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겠다는 사람은 그 누구든 나의 동정을 살 가치가 없다....


나는 전쟁이라면 목적과 상관없이 무조건 반대하는 평화주의자들은 간첩처럼 위험하고 파괴적이라고 말하는데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나치, 파시스트, 공산당과 평화주의자들은 모두] 전쟁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그들의 의견이 하나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데에 있어서 그들은 하나가 되었다.


평화주의자들은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원한다’고 말한다. 미국이 이 단체들의 요구를 들어주어 국방계획을 없앤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미국의 적들은 미국의 무방비 상태를 이용, 정부를 전복시키려 할 것이다.


전쟁을 배격한다는 그들은 왜 초대 교회의 사도들처럼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들을 찾아가서 평화를 전하지 않는가? 미국 같은,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에서 평화를 전파하기 위하여 수백만 달러를 쓰는 대신에 (평화를 파괴하려는) 베를린, 로마, 동경으로 가야 할 것이 아닌가?


세균은 곁가지에서가 아니라 근원지에서 박멸해야 한다. 미국의 손발을 묶는 평화주의자들은, 적극적인 반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평화와 민주주의의 대의를 파괴하는 자들이다.


(이 글은 기독교 세계관 월간지 <월드뷰> 2022년 7월호에 실린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