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평세

조던피터슨과 솔제니친이 지금 한국에 던지는 경고

지난 12월 11일은 <수용소군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암병동> 등 구소련 사회주의 체제 비판 작품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1918~2008)의 탄생 100주년이었다. 이를 기념하여 러시아와 영미권에서는 그의 문학 작품들과 그 영향력을 기억하는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다.

영국의 펭귄 출판사는 지난 11월 1일, 솔제니친의 탄생 100주년과 그의 대표작인 <수용소군도>의 집필 50주년(1958년부터 10년간 집필되어 1973년에 파리에서 총 3권으로 출판되었다)을 기념하여 이 책의 영문특별판을 단일 요약본으로 재출간했다.


이 <수용소군도> 특별판이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그 서문을 최근 전 세계적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히 ‘피터슨 현상’이라고 불릴 만큼 큰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토론토대학 심리학 교수 조던 B. 피터슨이 썼다는 것이다. 유튜브를 통해 이미 전 세계에 엄청난 팬덤을 형성하고 있는 피터슨 교수는, 그의 최신작인 <12가지 인생의 법칙>을 통해 국내에서도 이제 제법 많이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12가지 인생의 법칙> 은 올해 초 출간 6개월만에 미국과 캐나다에서 200만 부가 넘게 팔렸고 한국에서도 지난 10월 한국어 출간 후 불과 한 달이 되지 않아 10만 부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펭귄 출판사는 솔제니친의 위대한 대작을 젊은이들에게 최대한 많이 읽혀야 한다는 판단에, 다른 소련 문학가나 작가가 아닌 조던 피터슨 교수에게 서문을 부탁한 것이다.

피터슨 교수의 솔제니친 소환이 의미하는 것

피터슨 교수는 솔제니친의 열렬한 팬으로, 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 중에 솔제니친을 손꼽을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언제나 학생들과 유튜브 구독자들에게 솔제니친의 작품을 읽을 것을 권유해 왔다. 그러나 더 중요한 (그러나 한국의 출판사는 애써 언급하지 않는) 사실은 바로 피터슨 교수가 현재 세계에서 아마도 가장 영향력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자라는 것이다. 그는 그동안 강연을 통해 아직까지도 자유민주사회를 위협하는 마르크스주의와 그 현대 변종들, 즉 페미니즘, 네오막시즘, PC(political correctness)주의, 젠더(gender) 정치 등을 매우 강력하고 논리적으로 분쇄해왔다.

조던 피터슨의 <수용소군도> 특별판 서문을 보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이 매우 호소력 있게 담겨 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지난 약 100년 동안 무려 1억여 명의 인명을 살상한 치명적 이념이라는 것을 상기하며 이렇게 개탄한다.

“도대체 왜 멀쩡한 사람들 사이에서 공산주의의 철학을 찬양하거나 마르크스의 업적을 칭찬하는 것이 용납되는가? 어떻게 시장경제와 민주적 서구사회의 ‘폐해’를 마르크스주의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 교리가 도대체 왜 ‘진보적’인 것이고 적합한 것이라고 동정심이 많은 맨정신의 사람들에게 납득될 수 있다는 말인가? …. 그 어떤 정치적 실험도 이처럼 광범위하게,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매우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는 다양한 나라에서 시도되었다가 이렇게 완전하고 처절하게 실패한 경우가 없다. (이것은) 단순한 무지일까? 혹은 성공한 이들에 대한 무한한 질투일까? 아니면 인류 자체에 대한 증오와 비슷한 그 무엇일까? 도대체 얼마 만큼의 증거가 필요한 것일까? 왜 우리는 계속 진실로부터 눈을 피하는 것일까?”


피터슨은 이어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을 물질주의적 유토피아에 대한 맹목적 환상이라고 정확히 규정하며, 이러한 ‘인간 완성’에 대한 혁명적 열의는 각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뿐 아니라 그 개인의 양심을 무디게 해 그 어떤 윤리와 도덕적 희생도 정당화시킬 수 있는 매우 파괴적인 경향이라고 설파한다.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많은 인기를 모으고 있는 조던 피터슨 교수가 이처럼 선명하게 마르크스주의와 그 현대 변종들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한국 대학가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은 여전히 많은 청년들을 미혹하고 ‘개인’과 ‘양심’을 상실하게 만드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매년 여름 고려대에서는 ‘맑시즘’이라는 국내 최대 규모의 마르크스주의 포럼이 열린다.

극좌 마르크스-레닌주의 성향의 단체인 ‘노동자연대’가 지난 13년 동안 주최해온 2박 3일 행사다. 전국의 노동조합이 대거 집결하는 이 행사날이 되면, 총학생회를 비롯한 많은 교내 동아리가 전국에서 몰려오는 ‘노동자’들을 환영하는 대자보와 플래카드를 게시한다. 올해 고려대 일반대학원 총학은 올해 2학기에 마르크스주의를 주제로 하는 학술강좌를 주최하기도 했다.

사실 대학가에서 피가 끓는 청년들이 마르크스주의의 매력에 호기심을 보이는 현상은 한국에서 뿐 아니라 대부분의 서구 사회 청년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통과 의례다. 그러나 문제는 자유민주 가치관의 뿌리와 교육이 비교적 탄탄하게 정립되어 있는 영국이나 미국에 비해, 한국사회는 그 정치철학적 가치관과 전통이 거의 전무한 토양일 뿐 아니라 80년대 중반 이후 그 교육기반마저 전교조, 전대협 등의 반(反)대한민국, 친(親)북한 전체주의 세력에 의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무너져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자유민주 가치관과 공화주의, 법치주의에 대한 이렇다 할 교육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대다수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의 좌익세력은 이 틈을 타 ‘반독재민주화운동’이라는 간판 하에 대학 문화를 장악하여 그들의 물질주의적 유토피아 환상 혹은 그 ‘사람 중심’ 주체사상이라는 변종을 집요하게 주입해왔다.

체제 경쟁과 ‘역사 전쟁’이 종결되지 않은 사회문화적 토대에서 마르크스주의와 그 변종들이 대학청년문화를 장악했다는 것은 그 나라에 미래가 없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사회가 규정한 ‘비인간적 반인륜 범죄 집단’이자 한국 민족의 최대 학살자인 김씨 일가를 ‘백두위인’으로 칭송하고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젊은이들이 광화문 한복판과 공중파에서 부끄럼 없이 설치는 모습만 봐도, 한반도의 미래에 자유민주체제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 정도는 다르지만, 미국도 공산전체주의 체제의 자국민 인권 유린과 대외적 위협을 도외시하고 미·중·소 데탕트를 추진했던 과거가 있었다. 불과 20년 전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을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냈던 미국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만과 무지, 그리고 매너리즘에 빠져 소련과 중국의 사회주의를 포용했다. 미국 사회에 깊이 잠식한 낭만적 평화지상주의와 물질주의 환상으로 인해 ‘창조주가 부여한 개인의 생명과 자유’라는 자명한 진리에 대한 신념과 도덕적 가치관을 상실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 전체주의 체제 하의 신음하고 있는 개인들을 외면했다. 한국 청년들, 솔제니친의 경고에 귀 기울여야

이 때 미국인들의 귀에 꽹과리를 후려치는 듯한 경종을 우린 인물이 바로 솔제니친이다. 미국 망명 직후 1974년에 영문으로 출간된 <수용소군도>와 이듬해 미국과 영국에서 연설한 내용들은 잠들어 있는 개인의 ‘자유의식’을 흔들어 깨웠다. 이 연설들은 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대소련 봉쇄정책을 설계한 조지 케넌은 <수용소군도>를 “한 정치체제를 상대로 한 현시대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단 하나의 고발장”이라고 평했다. 이 고발장은 특히 소련 붕괴에 가장 획기적인 역할을 했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마음을 울리는 역할을 했다. 어느 역사학자는 소련 붕괴의 시작이 <수용소군도>의 출간에 있다고 기록할 정도다.

당시 솔제니친이 미국과 영국 국민들에게 역설했던 일침은 현재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에게 정확히 적용될 수 있는 경고들이다. 1975년 미국노조연맹인 AFL-CIO에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여기서 우리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있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사람들이 정신병원에 갇혀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다면 그것은 데탕트가 아닙니다…. 데탕트는 미소나 말 뿐의 양보가 아닌 확고한 기초에 근거해야 합니다….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들은 협상에 능합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아무런 양보를 하지 않다가 막판에 가서 조금 양보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며 ‘보라, 그들의 양보를 얻어냈다. 이제 서명할 시간이다’라고 외칩니다…. 그들은 전쟁이 아닌 것은 평화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테러, 폭력, 감옥, 수용소. 이것들이 평화입니까?”


또 이듬해 봄 영국 BBC방송에 출연해서는 이렇게 경고했다. “지금 화두는 어떻게 소련이 전체주의에서 벗어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서구세계가 같은 운명을 피할 것이냐’ 입니다…. 서구는 저항의 도덕적 의무를 저버렸습니다…. 당신들을 이기기 위해서 소련은 이제 핵무기도 필요 없습니다. 맨손으로 당신들을 제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쌍수를 들고 양보하는 상대와 왜 핵대결을 하겠습니까” 여기서 ‘소련’을 ‘북한’으로, ‘서구세계’를 ‘대한민국’으로 바꾸면 지금 한국에게 정확히 해당되는 경종이다.

미국은 솔제니친의 경고를 가슴깊이 새기고 분명한 도덕적 기준으로 전체주의를 ‘악’으로 규정한 레이건 대통령을 당선시켜 소련제국을 역사의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한국은 그럴 수 있을까. 솔제니친이 <수용소군도>의 마지막 문단에서 비탄했던 경고가 무섭게 사무친다.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좌익’ 지식인들이여! 좌파 노동자들이여! 미국과 독일과 프랑스의 (그리고 한국의) 진보적 학생들이여! 당신들에게는 이 모든 증언들이 소용없겠지요. 당신들에게는 나의 이 책이 헛된 노력이겠지요.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당신들의 두 손이 등 뒤로 묶인 채 우리들의 [수용소]군도에 상륙할 때, 비로소 이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부디, 그 군도에 이르기 전에, 솔제니친을 읽고 깨닫기를 바란다.

출처 : 미래한국(http://www.futurekore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