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평세

생명권 보호와 국가의 양심

미국 건국의 기초문서인 독립선언문을 보면 모든 사람이 창조주로부터 생명권과 자유권와 행복추구권이라는 양도 불가능한 권리(unalienable rights)를 부여받았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 정부의 목적이 그 천부인권(God-given rights)을 보호하는데 있음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세계 최초의 민주공화국인 미국의 기초문헌에 많은 권리들 중 생명권과 자유권과 행복추구권이 명시된 것, 그리고 그 순서대로 적힌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기서는 이 천부인권 중 첫 번째인 생명권과 국가의 양심을, 한국사회에 너무도 만연한 낙태 문제를 중심으로 조명해본다.

러셀 싸코(Sacco) 의사가 의료폐기물을 처리하던 중 낙태에 대한 경각심을 주기 위해 찍어서 제보한 사진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태아생명권


다음 달 4월 11일이면 헌법재판소가 낙태죄를 “헌법불합치”(재판관 4인 불합치의견, 3인 위헌의견, 2인 합헌의견)로 판결한지 1년이 된다. 입법부인 국회는 올해 말까지 낙태죄 조항(형법 269조 1항, 270조 1항)을 개정해야 한다. 개정하지 않는다면 2021년 1월 1일부로 낙태죄 규정은 자동 폐지된다. 엄연한 생명인 태아의 생명권이 이제 합법적으로 침해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입법 권한을 가진 300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는 이번 4.15총선이 더더욱 중요한 이유다.


많은 낙태옹호론자들이 주장하는 낙태의 명분은, 임신 유지가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거나 강간 혹은 준강간에 의해 임신한 경우, 또는 부모가 유전학적 질환이나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등의 매우 특수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러한 특수한 경우의 낙태는 이미 모자보건법 제14조에 의해 합법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특수상황은 한국에서 매년 최소 10만에서 많게는 100만까지 추산되는 낙태 건수 중 매우 극소수에 해당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낙태는 경제사회적 이유다. 특히 태아의 생명을 산아제한 혹은 가족계획의 이름으로 희생시키는 한국사회의 관습과 풍조는 이미 한세대 이상 진행되며 우리의 양심을 시커멓게 태워놓았다.


이렇게 그 양심이 무뎌진 국가는 왜곡된 페미니즘 운동에 의해 “여성의 권리”라는 이름으로 가장 근본적 기본권인 생명권을 해치기에 이르렀다. 작년 헌재의 헌법불합치 판결도 낙태죄 조항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자연법적 기본권이자 국가가 보호해야 할 생명권보다 자기결정권을 우선시 한 것이다. 그러면서 입법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듯 “태아가 모체를 떠나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임신 22주 이전”의 시점에서는 “국가가 태아 생명보호의 수단 및 정도를 달리 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즉, 임신 22주가 도달하기 이전의 태아는 그 생명권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의해 침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체를 떠나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태아의 생명이 아직 그렇지 못한 태아의 생명보다 그 존엄성의 정도가 더 크다거나,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덜 보호받아도 된다는 논리는 납득이 어렵다. 사실상 갓 태어난 아기도 부모의 끊임없는 보호와 관심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또 어떤 장애나 일시적인 신체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보호자나 의료인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그러면 이들의 생명권은 보호책임자의 자기결정권에 의해 침해될 수 있다는 것인가?


태아의 독자생존이 22주라는 기준도 유효하지 못하다. 얼마 전 트럼프 대통령의 의회 국정연설(State of the Union) 행사에는 21주에 태어났던 초미숙아 엘리 슈나이더(Ellie Schneider)가 건강한 두 살 아이가 되어 어머니와 함께 참석해 주목을 받았다. 한국에도 2013년에 21주 5일(152일)만에 태어난 ‘오삭둥이’가 있었다. 무엇보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의학발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 수 없다.

지난 2월 4일 트럼프 대통령의 의회 국정연설에 참석한 초미숙아 엘리 슈나이더

인간 생명 중 가장 작고 연약하며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권리보호는 국가와 우리 모두의 책무다.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의 소멸이 덜 패륜적이거나 우리의 부담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올해 안에 반드시 관련 조항 개정을 이루어 내년에 무분별한 낙태가 합법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태아 생명의 존엄


우리 크리스천들은 인간의 생명이 언제 시작하는지와 그 생명이 그 자체로 동등하게 존엄하며 신성하다는 분명한 판단 기준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 바로 성경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창세기 1장 27절 말씀과 모태에서부터 인간을 만드시고 아셨다는 표현들(욥 31:15, 시 22:10, 시 139:13~16, 사 44:24, 사 49:1; 렘 1:5, 갈 1:15 등), 그리고 살인하지 말라는 창조주의 뚜렷한 명령(창 9:4~6, 출 20:13)이 있다. 이 외에도 태아의 생명됨과 인격적 존엄성을 보다 명백하게 증언하는 다음의 5가지 본문이 있다.


1. 먼저 태아도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인격체다.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자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눅 1:41~44)”


2. 인간은 수정 때부터 죄성을 품고 있는 인격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5)” 다윗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기도하면서 그가 어머니 뱃속에서 잉태할 때부터 죄인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3. 인간은 모태에서부터 독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인격체다.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 (창 25:22)” 쌍둥이 에서와 야곱은 리브가의 뱃속에서부터 각자의 성질대로 서로 다투고 장래가 나뉘었다.


4. 낙태가 살인이라는 가장 분명한 성경구절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규율 중에 명시되어 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조산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 (출 21:22~23)” 이 구절에서 ‘조산’은 사실 모든 한국어 번역이 ‘낙태’로 잘못되어 있어서 한글성경만 보면 오해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어성경(NASB, NIV, ESV, NKJV)은 낙태(aborted)나 유산(miscarriage)이 아닌 조산(premature birth)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 구절의 히브리 원어도 ‘[아이가] 나오다’를 뜻하는 얏사(yatsa)로 되어 있고, 다른 본문(창 31:38, 출 23:26, 욥 21:20, 호 9:14)에서 ‘유산’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된 네펠(nephel)이 아니다. 오히려 ‘얏사’는 보통 정상출산을 표현할 때(창 25:26, 38:29, 렘 1:5) 쓰여 졌다. 이 구절은 태아의 생명을 해하는 것이 사람의 생명을 해하는 것과 같은 급의 범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5.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레 17:11)” 이 구절이 함의하는 것은 늦어도 태아의 핏줄이 생기고 심장이 뛰어 피가 돌기 시작하는 5, 6주째부터 태아가 이미 엄연한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정부터 5주 이전까지는 생명이 아니라는 변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산모가 임신사실을 인지하게 되는 것은 5, 6주차 이후이기 때문에 어차피 낙태허용의 여지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의 여러 주에서는 태아의 심장박동이 감지되는 6주부터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일명 Heartbeat bill)이 입법되고 있다.


참 여성주의와 생명존중 문화


헌재판결에서 낙태죄 ‘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 3인은 ‘임신 제1삼분기’(first trimester), 즉, 임신 14주 무렵 이내에는 어떤 특별한 사유가 없어도 임신 여성이 자기결정권 행사를 통해 낙태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14주 이내에는 모체에 “안전한 낙태가 가능”하다는 – 태아의 생명권은 아예 고려하지조차 않은 –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임신주기가 짧을수록 ‘비교적’ 안전한 낙태가 가능한 것이지 그 어떤 낙태도 결코 해당 여성에게 온전히 안전하지 않다. 임신 9주까지 가능한 약물 낙태도 그 과정에서 해당 여성에게 큰 고통과 위험을 동반하며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을 초래한다. 또한 8주 이후부터는 2주마다 임부의 사망 위험이 두 배씩 증가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낙태가 여성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낙태는 지극히 반(anti)여성적인 것이다. 마더 테레사가 지적했듯이 “낙태 피해자의 3/4, 즉 낙태된 아동의 절반과 모든 산모들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낙태옹호론자들이 주장하는 낙태의 또 다른 명분은 여의치 않은 경제사회적 여건이다. 양육이 어려운 상황에서 태어난 아이가 결국 버려지거나 적절한 보살핌을 못 받아 고통을 당하는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 논리 역시 취약하다. 양육에 합당한 “경제사회적” 기준이 매우 모호할 뿐만 아니라, 고통(suffering)을 없애기 위해 고통받는 자(sufferer)를 제거하자는 궤변이기 때문이다. 반면 낙태에 반대하는 생명주의자(pro-lifer)들은 태중의 생명은 물론이고 뱃속 밖의 생명도 마땅히 존중한다. 실제 고아 입양과 구제 등을 실천하는 이들은 대부분 생명주의자들이다.


한 가지 짚어야 할 것은, 낙태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무엇보다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지 누구를 비난하고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60년대부터 산아제한 혹은 가족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낙태를 묵인하고 사실상 권장되기까지 했던 우리나라에서는 한때 임신경험자의 절반가까이가 낙태를 한 적이 있다고 답한 설문조사도 있었다. 대한민국 여성 중 한사람 걸러마다 낙태경험자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들을 정죄하는 것은 실제 낙태를 예방하고 생명을 살리는데 전혀 효과가 없다. 낙태를 고려하는 여성은 이미 자신의 실수에 대해 타인이 비난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으며 자책감에 괴로워하고 있다. 낙태를 이미 한 경우에도 물론 그 죄의식과 상처에 괴로워한다. 이들에 대한 정죄나 비난은 오히려 솔직한 문제의식과 성숙한 상황개선 가능성을 막아버리고 사회의 문제회피를 유도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의 인식개선과 생명존중문화의 확산이다. 임신주기별 태아의 신체 및 의식의 발달과정, 즉 태중의 아이가 대체할 수 없는 한 명의 생명이라는 사실만 분명히 알려도 대부분의 여성들은 낙태가 아닌 생명을 선택한다. 그들은 단지 그 생명이 자신의 어떤 환경적 여건이나 어려움보다 무한히 더 큰 축복이고 기쁨이라는 것을 아직 모를 뿐이다.


낙태와 국가의 양심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특유의 재치와 유머를 통해 우리 모두의 정곡을 찌르는 다음의 말을 한 바 있다. “제가 보니 낙태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모두 (낙태를 피해) 잘 태어난 사람들이더군요.” 낙태죄 위헌 판결에서 ‘합헌’이라는 소수의견을 낸 조용호, 이종석 재판관의 반론도 같은 맥락으로 시작한다. “지금 우리가 낙태죄 조항에 대한 위헌, 합헌의 논의를 할 수 있는 것도 우리 모두 모체로부터 낙태당하지 않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태아였다.”

미국 연방법원에서 낙태를 합법화한 ‘로 대 웨이드(Roe v Wade)’ 법안 통과 10주년인 1983년에, 레이건은 <낙태와 국가의 양심>이라는 소논문을 직접 쓰고 책으로도 출간했다. 현직 대통령이 임기 중 책을 펴낸 경우는 레이건이 유일하다. 레이건은 이 책에서, 노예제를 폐지하지 않고는 미국의 자유공화국이 완전하지 않았던 것처럼, 태아의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지 않는 나라는 결코 자유국가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진정한 자유국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로부터 생명과 자유를 부여받았다는 자명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가치관의 실념으로 대한민국이 현재 존폐위기에 이르게 된 것은, 국가의 가장 기본 책무인 국민의 생명권보호를 경시한 ‘원죄’ 때문이다. 첫째로는 북한동포들의 생명권을 외면했고 둘째로는 산아제한의 이름으로 만연하게 이루어지는 낙태를 방조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양심의 목소리를 내야했던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세계 최대교회, 최고 선교사파송 비율 등을 자랑하기 전에, 먼저 가장 기본 중의 기본조차 지키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부흥은 전 세계의 자랑이지만, 그런 한국사회가 낙태율과 자살률과 아동수출(해외입양)이 세계 최고라는 사실은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정말 심각한 반성과 성찰을 요구한다.


정치적 진영(보수/진보, 좌/우 등)이나 여러 공략들의 조화가 아니라, 오로지 한 가지 이슈에 대한 의견을 바탕으로 후보를 평가해 투표를 결정짓는 것을 “단일이슈투표”(Single Issue Voting)이라고 한다. 크리스천 유권자가 모두 한 마음으로 처절한 반성과 회복을 구하고 선거에 ‘올인’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이슈가 있다면 그것은 생명과 낙태에 대한 것이다. 생명관은 후보자의 세계관을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지표이기 때문이다. 태아의 생명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정치인과 그렇지 않은 정치인의 세계관은 그 근본이 다르다. 이 상충하는 세계관이 내놓는 정책과 영향력은 국가의 향방을 완전히 반대로 이끈다.


이제부터라도 한국 크리스천들은 생명주의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국가의 양심을 회복해야 한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우리가 파괴한 생명만큼은 구해내야 하지 않을까. 모세는 40년 광야생활을 정리하며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라가 복 받는 확실한 방법’을 유언으로 남겼다. “내가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신 30:19)”


참고문헌


Wayne A. Grudem (2010), Politics According to the Bible, Zondervan.


Ronald W. Reagan (1984), Abortion and the Conscience of the Nation, Thomas Nelson.


(이 글은 기독교 세계관 월간지 <월드뷰> 3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