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경제적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가 경제이론의 탈을 쓰고 의식과 물질세계의 변화를 꿈꿨다면, 문화막시즘은 문화를 통해 무의식의 세계까지 지배하려 하는 전략이다. 기존 마르크스주의가 노동자를 해방하기 위해 그들을 억압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계급구조를 뒤엎어야 한다는 선동이었다면, 문화막시즘은 경제구조 이면에서 인간을 “옥죄고” 있는 전통, 가정, 성윤리, 종교, 학교, 법치 등의 정치사회와 문화의식까지 뒤엎어야 한다는 은밀한 혁명론이다. 둘 다 지극히 세속적인 것 같지만 한편으론 매우 영적이기까지 하다. 사회주의는 영혼을 부정하는 물질주의적 세계관으로 무신론을 표방하지만, 동시에 신과 종교를 극도로 의식하며 배척한다. 문화막시즘은 신을 부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신을 대적하고 기독교의 하나님을 모욕한다. 문화막시즘은 사회주의의 반(反)기독교적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보통 문화막시즘은 마르크스주의의 변형이나 발전된 형태, 혹은 서구세계에서 사회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론적 중간단계 혹은 계략 정도로 여겨지곤 한다. 그래서 네오막시즘, 자유주의 막시즘(libertarian Marxism) 혹은 서구 막시즘(Western Marxism)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자들이 기대했던 마르크스주의의 세계화가 실패로 판명나자, 이탈리아의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는 그 실패의 원인을 서구문화의 뿌리 깊은 기독교 근간과 질긴 전통에서 찾았다. 따라서 그람시는 국제사회주의를 위한 정치적 선동이 성공하기 위해서 “학교와 대학과 교회와 언론에 침투해” 사회의 의식구조를 탈바꿈하고 서구의 ‘문화적’ 생산수단을 통제해 사회문화의 헤게모니를 먼저 사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목적의식을 부여받은 프랑크푸르트의 이론가들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는 해체주의, 탈구조주의, 비판이론 등으로 발전했고, 결정적으로 프로이드(Freud)의 성 관념과 융합해 성 혁명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리고 프랑스와 미국 등의 대학가로 진출한 이들의 이데올로기는 결국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의 의식구조를 사로잡았다. 독일 68혁명의 지도자였던 루디 두치케(Rudi Dutschke)는 마오쩌둥이 “장정(Long March)”을 통해 창시했던 게릴라 방식을 빗대어, 이 그람시적 문화전쟁을 “제도권으로의 장정(long march through the institutions)”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수십 년에 걸쳐 은밀히 정부와 학계와 법조계, 그리고 언론계에 침투해 서서히 서구의 제도권을 매우 성공적으로 장악해나갔다. 때문에 액튼연구소(Acton Institute)의 새무엘 그렉(Samuel Gregg) 소장은 그람시를 마르크스나 레닌을 뛰어넘는 “역사상 가장 위험한 사회주의자”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한편 프랑스와 미국의 68혁명은 풍요롭고 자유분방한 베이비부머들 속에서 ‘성혁명’으로 폭발했다. 프랑스에서는 남학생들이 여학생들 기숙사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가 그 시작이었다. 미국에서 일어난 베트남 반전(反戰)운동 또한 “전쟁 말고 섹스를 하자(Make Love, Not War)”라는 구호에서 알 수 있듯이 반전운동을 빙자한 프리섹스 혁명이었다. 실제로 시위 후에는 난교파티가 성행했다. 성윤리의 붕괴는 가정관의 붕괴는 물론이고 가장 기초적인 사회질서, 즉 남성와 여성의 구분마저 무너뜨린다. 대학의 이론가들은 이런 사회흐름을 반영해 젠더이론, 비판이론 등의 각종 궤변으로 비정상을 정상화시킨다.
당시 어느 마르크스주의 모임에 참석했던 말로리 밀렛(Mallory Millett)은 참석자들이 다음과 같은 문답을 종교의식처럼 외쳤다고 한다.
“우리는 왜 여기 있는가?”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다!”
“무슨 혁명인가?”
“바로 문화혁명이다!”
“어떻게 문화혁명을 일으키는가?”
“미국의 가정을 파괴하면 된다!”
“어떻게 가정을 파괴할 수 있는가?” ....
“일부일처제를 무너뜨리면 된다!”
“어떻게 일부일처제를 무너뜨리나?”
“난교와 호색과 매춘과 동성애를 조장하면 된다!”
말로리 밀렛은, ‘페미-막시즘의 바이블’이라고 불리는 <성정치>(1970)의 저자이며 타임지가 ‘여성해방의 마오쩌둥’이라고 불렀던 케이트 밀렛(Kate Millett)의 동생이다. 언니를 따라 사회주의와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했다가 회심했다.
주목할 것은, 종교와 가정 같은 사회문화 저변의 근본과 전통을 파괴해야 한다는 문화막시즘의 목표가 사실상 본래 마르크스주의의 정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문화막시즘은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우선 그 창시자인 마르크스의 삶이 그 정신을 잘 드러낸다. 그는 그의 부친을 저주했고 장례식에도 불참했으며, 모친은 버려두고 오로지 생활비와 상속(?!)에만 관심이 있었다. 마르크스는 사치와 술과 주식투기(?!)로 모든 돈을 탕진했다. 부인도 그를 “자본에 대해 글을 쓴 만큼 가족을 위해 자본을 저축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며 가족의 생계를 내팽개친 마르크스를 두 번이나 떠났다. 마르크스는 또한 하녀를 통해 낳은 사생아도 있었다. 부인의 장례식에도 그는 참석하지 않았고 부인의 상속도 모두 탕진했다. 마르크스의 두 딸과 사위는 그가 창시한 공산주의 이상에 빠져 살다가 미쳐서 자살했고 다른 세 명의 어린 자녀들은 이미 영양실조로 죽었다. 그는 그의 자금줄이자 동료였던 엥겔스(Engels)에게 산상수훈의 표현을 빌려 “가정이 없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며 한탄하기도 했다. 물론 그와 엥겔스의 대표작인 <공산당선언>(1848)에도 “모든 영원한 진리의 폐지”와 “모든 종교와 도덕의 폐지”와 함께 “가정의 폐지”가 명시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일반적인 무신론자가 아니었다. 단순한 무신론자였다면 그렇게 적극적으로 종교를 “폐지”해야 할 열의가 뚜렷했을 수 없다. 그가 사회주의를 유물론적 무신론으로 포장한 것은 대중을 속이기 위한 위장일 뿐이었다. 그는 “위에서 다스리는 그 존재(하나님)에게 복수하고자” 사회주의를 창시했다. 그가 처음 <공산당선언>(1848)을 썼을 때 원래 제목은 <공산주의 신앙고백>(Communist Confession of Faith)’이었다. 책의 시작은 “어느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는 말로 시작한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무신론자(atheist) 혹은 비(非)기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反)기독교인(anti-Christian)이었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쓴 유일한 희곡 <울안엠(Oulanem)>(1839)은 ‘마누엘로’(하나님 혹은 임마누엘)의 철자를 뒤바꾼 것으로 성경의 이름이나 내용을 뒤집어서 부르는 사탄숭배의식의 표현이다. 실제로 헤비메탈 록앤롤 음악가들 사이에서 ‘울안엠’은 ‘적그리스도’의 동의어나 마찬가지다. 이 희곡은 울안엠이라는 인물이 그의 어린 동성파트너를 데리고 묵을 곳을 찾아 해매는 장면으로 시작해 결국 세계를 파멸하는 것으로 끝난다.
마르크스가 낳은 마르크스주의도 결국 그의 정신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역사는 보여준다. 1871년 파리코뮌 공산혁명의 구호는 잠언 1장 7절 말씀을 뒤집은 “하나님을 증오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였다. 같은 시기 또 다른 무신론 사회주의자 바쿠닌(Bakunin)은 그의 <신과 국가>(1871)에 “신이 존재한다면 그를 폐지해야 한다”고 썼다. 레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시체성애나 다름없는 것으로 여겼다. 러시아에서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첫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이 건국됐을 때 그들의 표어는, “땅에서는 자본주의자들을, 하늘에서는 하나님을 축출하자!”였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무신론 무장 연맹’(League of the Militant Godless)을 조직해 종교파괴를 본격화했다. 그들은 성직자들과 수녀들을 죽이기 전에 최대한 능욕해서 하나님을 조롱했다. 소련에서 망명한 솔제니친은 <수용소군도>(1973)에서
“마르크스와 레닌의 철학은 ... 하나님에 대한 증오가 가장 중요한 추진력”
이라고 썼다. 소련에서 시작된 그 사회주의는 결국 지난 한 세기 동안 최소 1억 명의 사람들을 학살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중국과 북한에서 진행형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태어나기 30년 전 일어났던 프랑스혁명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한다. 1789년에 시작한 프랑스혁명도 사실상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시10:4)”고 하는 대표적인 인본주의적 혁명이었고 인간이성숭배였다. 프랑스혁명을 구글에 영어로 검색하면 ‘de-Christianization’(비기독교화/기독교청산)이 연관검색어로 나오는 이유다. 당시 프랑스의 거의 모든 교회는 혁명가들에 의해 불에 타거나 “이성과 철학의 신전”으로 둔갑했다. 혁명가들은 귀족들보다 훨씬 더 많은 성직자들과 교인들을 끌어내 죽였다. 결국 프랑스혁명은 인간 이성(혹은 감성)을 절대 근거로 국가라는 신을 발명해냈다.
인간이 신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는 인본주의 혁명이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이라면, 휘태커 챔버스(Whittaker Chambers)가 <증언(Witness)>(1952)에서 말했듯이 사회주의는 에덴동산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3:5)”
라는 속삭임으로 시작된
“인간의 두 번째로 오래된 신념”
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 이전의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렸던 미국의 오레스테스 브라운슨(Orestes Brownson, 1803~1876)도 사회주의를 기독교의 이단(heresy)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문화막시즘은, 그 전신인 마르크스주의나 그 씨앗인 프랑스혁명과 마찬가지로, 본질상 반(反)기독교 종교운동이다. 그람시도 “프롤레타리아의 문화전쟁은 종교활동을 모방”해서 사회에 반복적으로 그들의 내러티브를 주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주의 로버트 스미스(Robert Smith) 교수는
“마르크스주의는 그 원형으로나 문화적 형태로나, 그 스스로의 거짓 선지자(마르크스)에 의해 거짓 교리(유물론)와 거짓 사도들(레닌, 스탈린, 마오쩌둥, 그람시 등)과 거짓 희망(공산 유토피아)으로 이루어진 복음의 변종 패러디물”
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문화막시즘을 맞닥뜨린 교회와 성도의 역할은 자명하다. 리처드 니이버(Richard Niebuhr)는 <그리스도와 문화>(1951)에서 기독교의 문화관을 다섯 유형으로 구분했다. 바로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문화 위의 그리스도,’ ‘문화와 역설관계에 있는 그리스도,’ 그리고 ‘문화의 변혁자인 그리스도’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에 따라 다르겠지만, 개혁주의 신앙의 관점에서 오늘날의 교회는 다섯 번째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를 믿으며 기회와 책임이 주어지는 대로 세상의 타락한 문화와 맞서 싸우는 것이 성화의 과정에 임하는 자세일 것이다.
(이 글은 한국기독문화연구소 소식지 2021년 1,2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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